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우정(牛汀) 이동찬(李東燦)

(1922~2014)

 

▲ 코오롱그룹 이동찬(李東燦)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우정(牛汀) 이동찬(李東燦)은 한국 섬유산업을 개척하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이끈 1세대 기업인이다.

 

1922년 4월 1일 경북 영일군에서 코오롱그룹 창업주인 이원만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후 소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포항에 있는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열다섯의 나이에 일본으로 떠나 부친이 설립한 ‘아사히공예사’에서 일하며 주경야독 생활 속에 ‘흥국상업학교’ 야간부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도 당당히 합격한다.

 

▲ 흥국상업 야간부 시절 주경야독

1944년 스물셋의 나이로 조선학도특별지원병으로 입대해 식민지 청년으로 울분과 고난을 겪으면서 조국해방과 부국의 꿈을 키워 나갔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전쟁의 여파로 헐벗은 국민에게 따뜻한 옷을 입게 하여 사회봉사와 애국을 실천하겠다는 신념아래 경북기업이라는 직물공장을 설립했다.

 

이후 더 큰 사업에 뜻을 품고 경북기업을 정리한 후 상경하여 단칸 사무실에 삼경물산 서울사무소와 후일 코오롱그룹의 시발점이 되는 개명상사를 1954년에 설립하여 한국과 일본의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나일론의 개화기를 앞당겨 나갔다.

 

1957년 4월 12일, 부친 이원만 선대회장과 함께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나일론사를 생산하며 한국 섬유산업의 기수로 등장해 역사에 큰 획을 긋는다.

 

나일론사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품귀현상까지 빚자 1963년 일산 2.5톤 규모의 공장 준공을 시작으로 1967년 증설을 통해 10톤 공장으로 도약한다.

 

 코오롱그룹은 우리나라 최초로 나일론사를 생산하며 한국 섬유산업 역사에 큰 획을 긋는다.  © TIN뉴스

 

나일론사의 수요확대에 따라 1968년 판매전담회사로 코오롱상사를 창립하고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어 폴리에스터사의 제조에도 착수하여 1968년 한국폴리에스텔 등을 설립하게 되었고, 1970년 한국나이롱 사장에 취임하면서 원숙한 경영인으로서의 길을 걷는다.

 

회장 취임해인 1977년, 한국나이롱과 한국포리에스텔을 주식회사 코오롱으로 상호 변경하였으며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제조업에 첨단 경영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나일론사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게 되자 사업다양화와 제품다양화를 모색하며 타이어코드 등 신제품 개발에 주력했다.

 

▲ 이동찬 명예회장이 1978년 코오롱 울산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TIN뉴스

 

1980년대에 들어서는 필름, 비디오테이프, 메디컬 등 관련 사업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사업다각화에 성공하면서 코오롱을 명실상부한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이외에도 1982년부터 1996년 1월까지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올바른 노사관계 정립과 기업윤리의 확립에 앞장섰으며 1983년부터 3년간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며 섬유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섬유백서’를 발간하는 등 섬유산업의 선진화에 힘썼다.

 

▲ <사진 좌>1982 금탑산업훈장 수장 <사진 우>1992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장  © TIN뉴스

 

또한 1982년 기업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등 49년간 기업인으로서 대내외의 존경을 받았다. 1992년에는 개인에게 수여되는 국내 최고의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수장했다.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는 이동찬 명예회장이 등산을 통해 체득한 경영철학으로 정상을 목표로 삼아 겸허한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오르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서서 호연지기를 만끽하게 된다는 경험에서 배어나왔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무리하게 속도를 내거나 성급한 판단에 따른 경영을 지양하고 그룹 전체가 서서히 산을 오른다는 자세로 그룹을 이끌었다.

 

▲ 60대 초반 북한산을 찾은 이동찬 명예회장 

특히 여럿이 함께 등산을 하다보면, 뒤에서 따라갈 때는 힘들고 짜증스럽지만 앞장서서 산을 오를 때는 뒷사람을 인도한다는 사명감과 보람으로 고된 줄 모른다고 강조했다.

 

불황은 기업으로 하여금 호황 때보다 더 큰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경쟁력 강화의 계기가 되는 것이니 모든 사원은 합심하여 불굴의 의지와 인내로 슬기롭게 이를 극복해야 한다.

 

-1982년 자서전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中에서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 2002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장_상암월드컵경기장  © TIN뉴스

 

故 이동찬 명예회장의 어록

 

“<남이 장에 간다고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한국 속담 식으로 어떤 업종이 호황을 이룬다고 해서 무턱대고 뛰어드는 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신이 가장 잘하고 있는 분야에서 조금씩 발전을 시도하고 변신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 성공적으로 기업을 이끄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1986년 10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초청 강연

 

“기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종업원 모두의 사회 생활의 터전이며 원천인 것입니다.  사회 번영의 원천이므로 사회의 공기업입니다.  그렇기에 기업의 부실은 사회에 대한 배신이며 배임입니다.” -1981년 10월 KBS <나의 경영철학> 방송 강연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들은 정말 많은 역경을 극복해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근본적으로 우리 국민은 위기관리 능력이 탁월한 민족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만간 정치인을 비롯해서 많은 국민들 사이에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는 위기의식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리라 내다봅니다.  “이렇든 역경을 순경으로 극복, 오히려 위기를 찬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활관이자 경영철학입니다.  또한 결코 요란스럽지 않은 가운데 혁신을 기해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 1976년 10월 ㈜한국나이롱 대표로 재임시 강연

 

“기업은 국가 경제 발전의 주요한 주체이며, 사회 발전의 원천이고 직장인의 생활터전입니다. 따라서 후손에게 풍요로운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은 기업가의 사명입니다” - 1987년 4월 중앙대학교 정경대학 강연

 

“가을에 파종한 보리 씨앗이 꽁꽁 얼어붙은 동면(冬眠)의 시간을 지나 봄에 힘차게 싹을 틔우듯이 우리도 이 겨울의 불황과 동면기의 모든 어려움을 참고 체질을 강화하여 현재의 위기를 앞날을 위한 도약대로 삼읍시다.” -1992년 인력개발 연구원 세미나

 

“나는 평소 직장이라는 것은 사회 생활의 터전이고 사회 번영의 원칙이니만큼 기업의 도산이란 분명히 사회에 대한 배신 행위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절대 무리하지 않고 분수에 맞는 경영을 펴왔으며 이상은 높게 갖되 겸허한 자세로 이를 정복해 나가는 <등산식 경영>과 목표를 향하여 쉼없이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해 나가는 <마라톤식 경영>으로 코오롱을 이끌어 왔습니다.” -1991년 9월 월간 <리쿠르트> 인터뷰

 

“어떤 사회라 하더라도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이 없는 인간 사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후진국의 차이는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생산적이며 효과적으로 처리∙관리하느냐에 달렸다 하겠습니다” - 1985년 3월 노총 창립 기념 행사 축사

 

“나의 신념은 한 마디로 <기업은 곧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기업의 모든 활동이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고, 기업의 끊임없는 변신을 위해서는 사람, 곧 우수한 인적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기업이 사회의 다른 분야로부터 인재를 스카우트해 오던 과거와는 달리 기업내에서 양성된 인재들이 사회 각 분야로 진출, 활약해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재를 교육시키는 데 있어 기업 목적뿐만 아니라 사회 봉사라는 한층 더 높은 차원을 고려해 왔던 것입니다.” - 1982년 12월 한국경영학회 모임에서 주제강연

 

“평사원은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린 작은 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매달려 있어야 하는 곳에 매달려 자기 능력만큼의 빛을 발휘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임이 되고 대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린 작은 전구여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그 약한 촉광으로 주위를 구석구석 비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승진을 한 사람은 엄지손가락만한 전구에서 50와트, 100와트의 빛을 발하는 전구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전구는 올라갈수록 촉수를 더해야 주위를 밝힐 수 있습니다” - 1977년 10월 승격자 사령장 수여식 중 훈시

 

“저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마라톤을 좋아합니다.  마라톤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페이스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 점이 저의 인생 철학과도 맞아떨어졌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쉼없이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해 나가는 마라톤식 경영으로 저는 코오롱을 이끌어 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즉 사업을 하는데 있어 신속하고도 과감한 결정과 추진력도 상당히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는 전체의 흐름 속에서 모든 요인을 놓치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마라톤이 그런 가르침을 저에게 주곤 했습니다.” – 1992년 8월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황영조 만찬회 연설.

 

“허나 키운 후에 놓아 주어야 하는 것은 비단 자식뿐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박찬숙이 내게 남긴 교훈도 그것이었는지 모릅니다. 포기할 줄 아는 마음, 놓아 주는 마음⋯.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독립시켜도 좋겠다 싶을 만큼 성장시킨 후에는 놓아 줄 수도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 밑에서 일을 배운 직원이 독립해 나간다고 하면 그 또한 보내 주고 도와 주어야 하는 용기, 그런 용기가 우리 기업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 1992년 자서전 <벌기보다 쓰기가 죽기보다 살기가>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이 말은 나의 등산식 경영 철학이자 내가 등산을 통해 터득한 교훈입니다. 나는 이제까지 이러한 교훈과 함께 등산을 하는 기분으로 회사를 경영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기업을 다루는 나의 경영 방식에서 무리를 느끼는 스피드나 성급함을 찾아볼 수 없다고도 합니다. 또 그룹 전체가 서서히 산에 오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도 합니다.” - 1992년 자서전 <벌기보다 쓰기가 죽기보다 살기가>

 

“나는 생활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내 나름대로의 절제와 도리를 지키며 살아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감사와 자비의 정신을 잃지 않고 싶습니다. 세상에 별 사람이 다 있기 마련인데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이 사회를 좀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나보다 약한 사람에 대한 자비심과 나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치자면 손등에는 감사를, 손바닥엔 자비를 동시에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심리나 상대적 박탈감은 사라질 것입니다.” - 1992년 자서전 <벌기보다 쓰기가 죽기보다 살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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