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화승그룹 

현수명(玄修明) 1922~1977

현승훈(玄承勳) 1942~ 

 

▲ 화승그룹 현수명, 현승훈 부자  © TIN뉴스

1951년 고무신 생산공장으로 출발한 화승(和承)그룹은 신발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드는 위기 속에서도 지난 70년간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온 대한민국 신발산업 역사의 산증인이다. 

 

현재는 신발 외길에서 쌓아온 저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종합무역, 자동차부품, 소재산업, 정밀화학, 신발 제조자개발생산(ODM) 등에서 연매출 5조원을 돌파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화승그룹의 역사는 현승훈(玄承勳) 회장의 선친인 故 현수명(玄修明) 회장(이하 현수명)이 서울에서 공장을 하던 형들과 함께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시작된다.

 

충북 괴산이 고향인 3형제는 전란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 생산적인 일을 통해 국민경제에 기여하고자 지금의 부산고 근처인 초량동에 유리공장을 인수, 부산지역 신발제조 기술자들을 모아 동양(東洋)고무공업소란 이름으로 고무신과 장화 등을 만들어 팔았다.

 

해방 이후 고무신 수요가 늘어나면서 고무신 업계의 경쟁도 치열해진 가운데 신발산업에 입문해 첫 신발상표로 내놓은 ‘동자(東字)표’ 고무신은 당시 70여개의 경쟁업체들보다 뛰어난 품질로 입소문이 나면서 소비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는다.

 

▲ 화승그룹의 전신인 동양고무공업 공장  © TIN뉴스

 

1953년 휴전협정 후 형들이 서울로 올라가면서 부산에 혼자 남게 된 현수명은 그해 8월 동양고무공업사, 1957년 3월에는 동양고무산업주식회사(이하 동양고무)로 사명을 바꾸고 사장에 취임, 화승그룹의 본격적인 부산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빠르게 자리를 잡으면서 1958년 부산진구 부암동에 있는 철도청 부지 약 1만9000평을 매입하여 공장 확장에 나선다. 이때 뛰어난 품질에 합리적 가격을 더한 ‘기차표’ 고무신을 출시해 단숨에 신발업계의 선두주자로 부상한다.

 

▲ 화승그룹의 전신인 동양고무주식회사는 뛰어난 품질에 합리적 가격을 더한 ‘기차표’ 고무신을 출시해 단숨에 신발업계의 선두주자로 부상한다.  © TIN뉴스

 

당시 ‘기차표’ 고무신은 국제고무의 ‘왕자표’, 삼화고무의 ‘범표’와 함께 고무신 시대를 이끈 3대 브랜드였다. ‘기차표’가 사업 번창의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하면서 1960년에는 종사자수가 2천명에 이를 만큼 사세가 확장되며 재계 17위까지 도약한다.

 

1960년대 들어 화학섬유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동양고무도 주력상품을 고무신에서 화학섬유를 사용한 케미컬슈즈로 바꾸게 된다. 1965년에는 한국 신발 브랜드 1호로 잘 알려진 ‘기차표’ 신발을 출시하며 대한민국 신발의 브랜드화를 앞장서 주도했다.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원자재 가격 상승과 과열 경쟁에 따른 자금난으로 승승장구하던 동양고무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시장 개척에 나서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1966년 7월 끝내 부도를 맞고 법정관리로 넘어가게 된다.

 

한편으로 당시 신발산업은 생필품으로 분류, 정부의 저물가 정책에 눌려 1965년 이래 가격이 동결됐었다. 반면 일반물가는 크게 뛰고, 또 철도․전기요금 등 관영요금 인상 및 노임 현실화, 제반부대경비 누증 등으로 대부분의 중․소공장이 존폐위기에 놓여있었다.

 

▲ 화승그룹의 전신인 동양고무주식회사는 1965년 한국 신발 브랜드 1호로 잘 알려진 ‘기차표’ 신발을 출시하며 대한민국 신발의 브랜드화를 앞장서 주도했다.  © TIN뉴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현수명은 흩어진 경영진을 모아 1969년 5월 화승인더스트리의 전신인 풍영화성(豊榮化成)을 방계회사로 인천에 설립하고 일본 호에이고무와 기술제휴로 하루 4천 켤레의 케미컬슈즈를 생산하며 다시 한 번 신발산업에 도전장을 내민다. 

 

기존 생산방식에서 탈피, 가격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직매제도 도입 등 혼신의 힘을 쏟은 결과 점차 경영도 호전됐는데 이때 생산한 케미컬슈즈는 훗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은 물론 이후 세계적인 스포츠화 브랜드인 나이키로부터 대량 주문을 받는 계기가 된다.

 

한편, 설상가상으로 1971년 3월 법정관리를 받던 동양고무 공장에 대형 화재가 발생하며 약 2억원의 막대한 재산 손실을 입힌다. 당시 동양고무 건물은 23동(6천여 평)으로 하루 4만 켤레의 고무신 생산능력을 가진 국내 최대의 고무공장이였다.

 

화재 이후 관리은행인 한일은행측이 오너에게 경영을 맡기는 것이 좋다고 판단, 현수명은 다시 사장으로 복귀한다. 이때 풍영화성에서 기른 힘으로 나이키와 케미컬슈즈를 납품하는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계약을 체결하고 생산관리시스템을 구축한다. 

 

▲ 화승그룹의 전신인 동양고무주식회사는 1975년에는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과 품질을 바탕으로 ‘월드컵’ 브랜드를 출시하며 라이프스타일 슈즈를 만드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성장한다.   © TIN뉴스

 

“좌절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순풍이 분다”

 

1974년 11월 15일 마침내 부채를 청산하고 법정관리에서 벗어나는데 국내에서 부도를 이겨낸 최초의 성공 사례였다. 1975년에는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과 품질을 바탕으로 ‘월드컵’ 브랜드를 출시하며 라이프스타일 슈즈를 만드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성장한다. 

 

한때 업계의 선두주자로 군림하던 ‘기차표’는 신발이 총(總)고무화류에서 운동화류로 방향전환하면서 1979년부터 ‘월드컵’에 자리를 내준다. 이후 화승이 1986년 ‘르까프’를 내놓으면서 ‘기차표’에 이어 주력상표의 맥을 이어받게 된다.

 

1976년 풍영화성을 사상공단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케미컬슈즈 생산 시설을 설치하여 대량 생산을 시작한다. 같은 해 11월 제13회 수출의날에서 2천만 달러 수출 실적으로 받은 철탑산업훈장은 완벽한 부활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0년 12월 제17회 수출의날에 풍영화성이 1억 달러 수출탑과 금탑산업훈장을 받으며 동양고무는 대한민국 경제사에 권토중래의 철학으로 위기를 이겨내고 재기에 성공한 대표적인 기업으로 이름을 남긴다.

 

현수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로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두가 재기불능이라고 할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불가능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을 몸소 증명해 훗날 장남인 현승훈 회장에게는 큰 가르침이 되어준다.

 

한편, 현수명은 “내가 사두면 적어도 해외로는 유출되지 않을 것”이라며 여유만 되면 문화재를 사 모았다. 1978년 “문화재는 어느 누구의 소유이기 이전에 민족공유의 재산”이라는 유언에 따라 당시 싯가 3억원 어치의 60여 점의 문화재가 문화재관리국에 기증됐다.

 

▲ <사진 왼쪽> 화승그룹 창업주 현수명 회장이 1978년 부산박물관에 기증한 백자대호, 지난해 4월 국가지정 문화재(보물 제 2064호)로 지정됐다. <사진 우측> 선친의 문화재 사랑을 이어받아 화승그룹 현승훈 회장이 1988년 구입한 달항아리, 과거에 김환기 화백이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 TIN뉴스

 

이때 현수명이 평생 모았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산수인물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대련(對聯) 2점, 국보급의 백자대호(白磁大壺), 분청사기운학문병 등은 부산박물관의 첫 번째 유물로 선보이게 됐다.

 

1966년 부산대 졸업과 동시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생산부문에서만 줄곧 일하던 현승훈 회장은 1977년 숙환으로 갑자기 타계한 선친 현수명의 뒤를 이어 사장에 취임한다. 당시 동양고무는 자본금 2억원, 매출외형 290억원 규모의 중소기업수준에 불과했다.

 

법정관리에서 벗어난 지 3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 시련이 끝나지 않은 시기였지만 1978년 나이키와 제휴하면서 일약 대기업으로의 성장 기회를 잡는다. 또 내수위주에서 수출위주로 전환하는 전략이 적중하며 완전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취임 이후 해외기업들과 손을 잡으면서 첨단 신발 제조 기술을 익혔고 지방기업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울을 포함, 경기 충정 등 중부지역에 본거지를 둔 전자, 기초소재, 관광 계열사를 속속 설립, 대대적인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다.

 

▲ 2005년 12월 9일 화승그룹은 부산 롯데호텔에서 2010년까지 총 그룹매출 3조원을 달성을 위한 그룹비전과 C.I선포식을 갖고 새 도약의 의지를 다졌다. 회사기를 흔드는 화승그룹 현승훈 회장  © TIN뉴스

 

특히 1980년에는 동양고무와 풍영화성의 수출창구인 ㈜화승(和承)을 설립, 10년 만에 재계 랭킹서열 20위권에 드는 화승의 기초를 닦았다. 이때의 성과는 훗날 현승훈 회장이 재벌 2세보다 제2의 창업자로 불리게 된 배경이 되었다.

 

당시 섬유류에 이어 단일품목으로는 제2의 수출주력품목인 신발류는 국제상사, 태화, 삼화, 진양 등 4개사가 시장을 주도했는데 5위와 6위인 동양고무와 풍영화성이 화승을 설립, 수출창구를 일원화하면서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 판도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때 재계에서 평가하는 화승의 장점은 40년 동안 신발과 고무 부분에서 한우물만 팠다는 것이다. 또 품질고급화에 심혈을 기울인 점도 높이 평가됐는데 나이키, 리복 등 빅바이어를 만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화승은 글로벌 브랜드 신발을 OEM 방식으로 제조하여 부산지역을 신발산업의 메카로 만드는 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승과 손잡은 브랜드들은 하나같이 빠른 시간 안에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보여 “화승과 손잡으면 성공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또 그룹의 경영방침이 인화(人和)로 구축되고 일찌감치 전문경영인 체제가 정착되면서 신발과 고무업종에 속하는 화승의 각 계열사들은 나름대로의 강점을 살려나가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으로 성장을 뒷받침했다. 

 

▲ 1981년 화승그룹은 미국의 가장 큰 수입상인 블루리본스포츠(BRS)사를 확보, 나이키의 고가품을 수출하면서 신발수출 1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 TIN뉴스

 

특히 1981년에는 미국의 가장 큰 수입상인 블루리본스포츠(BRS)사를 확보, 나이키의 고가품을 수출하면서 양적수출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대의 신발공장을 갖고 있는 국제상사(손상모)를 밀어내고 신발수출 1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이외에도 국내수요의 거의 전량을 외산에 의존하던 운동화의 국산화를 위해 30억원을 투입, BRS사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연산 40만 켤레규모의 세계 최신 운동용품 전문공장을 부산 사상공단 인근 장림에 준공하고 나이키 상표로 국내시장 공략에도 나섰다.

 

1984년에는 세계적인 스포츠 용품 브랜드 ‘리복’의 제품을 국내에 런칭하며 고급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쌓는다. 1985년을 기점으로 화승은 국내 최대 신발업체로 급부상했는데 당시 신발수출의 20%를 점유하며 국내 신발산업을 주도했다.

 

▲ 1986년 화승그룹은 나이키의 무리한 수출단가 인하와 리복 등 다른 브랜드의 제품의 라이센스 생산의 이의제기에 결국 5년여 동안 맺어왔던 깊은 협력관계를 청산하게 된다. 이후 나이키는 삼양통상과 50:50으로 한국나이키를 세우고 이후 삼나스포츠를 거친뒤 오늘날의 100% 자회사 나이키 스포츠가 된다.  © TIN뉴스

 

1986년 화승과 나이키는 5년여 동안 맺어왔던 깊은 협력관계를 청산하게 된다. 당시 한국산 신발의 최대 바이어는 나이키와 리복으로 연간 약 2억 달러 정도를 수입했다. 화승은 나이키와 리복에 1985년 기준으로 각각 9천만 달러와 1억2천만 달러를 수출했다.

 

화승은 1984년 국내 신발업계와 나이키가 가격시비로 마찰을 빚은 것을 계기로 리복 등 새로운 바이어에 대한 수출비중을 늘려왔다. 1986년 나이키가 자사와 경쟁을 벌이는 업체에 대한 수출 제한 조건을 내세워 플레임을 걸었는데 화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화승은 국내 최초로 전문 스포츠화 사업을 전개, 스포츠화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또 나이키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될 경우 앞으로도 계속 질질 끌려가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당시에는 크게 작용했다.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강하게”

 

여기에 자체 기술 축적에 대한 자신감과 OEM으로 승부하며 느낀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도 깔려있었다. 무엇보다 ‘더(Le) 빨리(Citius)’ ‘더 높이(Altius)’ ‘더 강하게(Fortius)’라는 의미의 ‘르까프’ 브랜드를 세계적인 상표로 육성시킨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나이키와의 사업제휴 종결은 잘나가던 화승에게는 모험 그 자체였지만 “우리 것으로, 우리 이름으로 승부하자”는 현승훈 회장의 결연한 의지와 50년 노하우로 야심차게 탄생한 토종브랜드 ‘르까프’를 글로벌브랜드로 성공시키겠다는 열망이 더 컸다. 

 

▲ “우리 것으로, 우리 이름으로 승부하자”는 현승훈 회장의 결연한 의지로 탄생한 화승그룹의 토종브랜드 ‘르까프’ ‘더(Le) 빨리(Citius)’ ‘더 높이(Altius)’ ‘더 강하게(Fortius)’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 TIN뉴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자체 개발한 ‘르까프’는 국제상사의 ‘프로스펙스’와 함께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신발시장의 1위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1995년에는 브랜드 다각화를 위해 ‘케이스위스’ 라이선스를 취득해 안정적인 성장기반을 만들었다.

 

‘르까프’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로 세계적인 브랜드로의 성장을 눈앞에 두고 있던 화승에게 1997년 ‘외환위기’라는 뜻하지 않은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당시 화승은 1988년에는 근로자수가 9600여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신발업체로 발돋움했으나 1991년 이후 수출 주문 감소와 불경기 등으로 시설을 감축해 1993년 당시 7개 라인에 2500여명이 근로자가 근무하고 있었다.

 

결국 채권 은행의 자금 회수로 인한 자금난을 겪던 화승은 물론 화승그룹 계열의 화승상사, 화승관광개발 등의 계열사들이 1998년 3월 31일에 부도가 났으며, 그해 4월 1일에 화의 신청에 들어갔다. 

 

화승은 1999년 7월에 화승상사와 합병하고 화승파카, 화승파카공조, 화승강업, 화승제지 등의 회사를 매각하는 등 경영자 자산 처분 및 회사 소유의 주식과 유가 증권 매각을 통해 회생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그 결과 사양화로 접어들었던 신발산업도 흑자로 돌아섰다.

 

특히 그룹의 뿌리인 신발산업에서 닦은 화학 분야의 기술력을 토대로 설립한 화승인더스트리, 화승R&A의 고무를 다루는 기술, 내구성을 높이는 노하우가 자동차 부품 생산에서 빛을 발하면서 ‘외환위기’라는 거센 파도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버텨낸다.

 

2002년 7월에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으로 본점을 이전하였으며, 신발산업을 회복한 뒤 그해 9월 베트남에 43만㎡ 규모의 공장을 세웠다. 신발산업의 회복세에 기인해 2004년 8월에 부산지방법원에 화의 종결을 신청하였고, 2005년 1월 10일 화의가 종료됐다.

 

▲ 베트남 동나이성에 위치하고 있는 화승비나는 세계 최대의 신발ODM 공장이다.  © TIN뉴스

 

“어떤 역경에도 신발 끈을 풀거나, 신발을 벗어본 적이 없다”

 

화승은 과거에 글로벌 브랜드 신발을 OEM 방식으로 제조하여 부산 지역을 신발산업의 메카로 만드는 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는 5개 사업군, 국내외 60개 계열사, 연 5조2000억원에 육박하는 매출의 글로벌 그룹으로 성장했다.

 

특히 신발 ODM 사업군인 화승엔터프라이즈는 화승비나(베트남)와 장천제화대련유한공사(중국), 화승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 3개 법인의 국내 상장 회사로 아디다스 및 리복 운동화를 생산해 ‘세계 제1의 신발공장’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또한 신발 디자인과 개발, 마케팅까지 직접 참여해 기존 OEM 업계가 90일 걸려 마치는 수주~납기 일정을 45일로 앞당겼으며, 월평균 900만 켤레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최근에는 베트남 모자 OEM 생산업체인 유니팍스를 인수해 스포츠 모자 부문까지 확대했다. 

 

▲ <사진 좌측> 글로벌 회계∙컨설팅 법인 EY한영이 지난해 11월 주최한 제14회 EY최우수기업가상의 패밀리비즈니스 부문에 선정된 (왼쪽부터)화승그룹 현지호 부회장, 현승훈 회장, 현석호 부회장이 트로피를 들고 수상을 기념하고 있다. <사진 우측> 화승그룹을 키워낸 현승훈 회장의 ‘덕치 경영’을 조명한 이시형 박사의 저서 “걸어가듯 달려가라”  © TIN뉴스

 

현승훈 회장은 선친의 49재 때 성철 스님을 처음 만난 이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회사와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108배를 드리고 있다. 또 재계에서는 골프 안치고, 비서를 두지 않고, 부동산이 없다고 해서 ‘삼무(三無) 회장’이라고 불린다.

 

또 경영과 소유가 분리되지 않은 그룹임에도 전문경영인을 회장으로 승진시켜 기업의 전권을 주다시피 하는 완전책임경영체제를 구축해 오랜 세월 불협화음 없이 회사를 키워왔다.

 

날짜를 정해놓고 사장단 회의나 임원 회의를 하는 일이 별로 없고, 이따금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 하면서 대화를 나눈다. 온후한 성품에 연장자에게는 존경을 아끼지 않고 부하직원에게는 자상해 인간관계가 원만한데다가 추진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졌다.

 

▲ 화승그룹 현승훈 회장은 골프 안치고, 비서를 두지 않고, 부동산이 없어 ‘삼무(三無) 회장’이라 불린다. 또 1만평에 이르는 쓰레기더미 언덕을 사시사철 꽃이 피는 정원으로 40년 넘게 일궈왔다.  © TIN뉴스

 

이시형 박사의 저서 “걸어가듯 달려가라”에는 신발은 물론 자동차 고무 부품업계 1위까지 화승그룹을 키워낸 현승훈 회장의 ‘덕치 경영’과 1만평에 이르는 쓰레기더미 언덕을 사시사철 꽃이 피는 정원 ‘화승원(和承苑)’으로 40년 넘게 일궈온 스토리 등 어려움에 빠진 CEO들에게 도움이 될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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