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고합그룹 창업주 

장치혁(張致赫)

1932~

 

 고합그룹 창업주 장치혁 © TIN뉴스

고합그룹 창업주 장치혁은 1932년 평북 영변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이며 항일언론인으로 활동했던 부친(산운 장도빈 선생)과 모친(김숙자)사이의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장도빈은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주필로 활동하면서 항일독립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해 민족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 때문에 항상 일본의 감시를 받았고 나중에는 소련과 중국에서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그런 이유로 장치혁은 어린 시절 형제들과 함께 영변 외가에서 생활해야 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4세의 나이로 부모를 따라 남하했던 장치혁은 독립운동가 자녀들이 대개 그렇듯이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무척 어렵게 보냈다.

 

6·25 전쟁 직후 어수선한 시절이었던 54년, 서울 법대 1학년이었던 그는 미국 유학을 추진했으나 배 삯 5백 달러가 없어 좌절해야 했다. 그는 학업을 접고 서울 방산시장서 노점상을 시작, 바닥에서부터 사업을 익혀나갔다.

 

장치혁은 좌판장사를 하며 시장유통의 흐름과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끊임없이 다각적으로 연구했다. 그리고 그것에 민감하게 대응, 재빠르게 업종을 바꿨는데 2년간 미제과자와 껌, 시레이션 등 24가지를 팔았다.

 

물건이 인기를 얻으면 동일품목 판매자만 늘어나 결국 제조업자만 수지를 맞게 되는 구조에 유통업에 한계를 느낀다. 시장바닥을 2년여 누비며 어느 정도 목돈을 쥐게 되자 직조업을 결심하는데 이것이 고합그룹의 시작이 된다.

 

▲ 2012년 10월 15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레르몬토프 거리 공원에서 산운 장도빈 선생의 발해 유적 발견 100주년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두번째 사진은 발해 땅이 연해주까지 뻗어 있었음을 최초로 입증한 산운(汕耘) 장도빈(1888∼1963)으로 기념비는 산운의 아들인 장치혁 고려학술문화재단 회장(첫번째 사진 우측에서 3번째)이 러시아 정부와 우수리스크시, 러시아 연방극동대의 협조를 얻어 세웠다.   © TIN뉴스

 

그가 직물공장을 시작한 것은 그 무렵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한 때를 조금씩 벗고 옷감에도 신경을 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고견직기 5대를 사들여 대방동에 중화방직이란 직물공장을 차렸는데 선친이 평남 중화군 출신이었고 또 당시 둘째형이 중화상사란 무역회사를 경영했기에 동일 이름을 썼다.

 

직조업이 어떤 문양을 내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판단, 시장조사를 한 끝에 홍콩에서 쓰던 문직을 구해 제품을 생산했다. 이때 중화방직에서 만들어낸 제품은 수입산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홍콩제 양단과 거의 흡사했다.

 

그런데 값은 홍콩제보다 훨씬 싸니 날개 돋친 듯 팔렸고, 3년 정도는 물건이 없어서 못 팔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경쟁업체들이 늘어나고 경기도 예전 같지 않으면서 업종 변경을 모색하던 때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그는 이것을 계기로 자수정 광산업에 뛰어 드는데 당시 일본은 경제성장에 성공, 보석에 관심을 가질 때라 선금을 주고 물건을 살 정도로 별 노력 없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때 자수정광산을 통해 모은 큰돈으로 별 생각 없이 부동산을 매입했는데 가격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땀 흘려 노력한 대가에 못지않을 만큼 이윤의 폭이 크자 그는 기업인으로서 땀 흘리지 않고 부동산을 통해 돈을 버는 방법이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이때부터 공장부지나 사업상 필요한 땅 이외 투기를 목적으로 땅을 사지 않겠다는 신념을 세우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켜갔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국내시장보다 해외로 뻗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자주했다. 5·16이 일어난 1961년 당시 29세이던 그는 사업을 일시 중단하고 형님이 경영하던 중화상사의 무역관계일을 돕는다.

 

▲ 공장을 돌아보는 장치혁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구로이와 도쿄출장소장(오른쪽 첫 번째).   © TIN뉴스

그는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서 사업을 하기보다는 선진화된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 자세히 배울 수 있는 재충전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판단, 중화상사 동경주재원 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간다.

 

장치혁은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일본경제의 흐름과 저력을 하나하나 눈으로 확인하며 시장바닥과 거리, 공장주변을 다니며 우리나라에 필요한 사업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또 당시 새롭게 도입된 자본주의 시장 경제학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기업의 경영과 역할, 첨단기술에 관한 책을 통해 기초를 쌓아나갔다.

 

5년 간 일본 산업발달의 현장을 지켜보며 당시 새로 출간된 소위 신경제학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공부한 그는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한국경제에 미력하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한국에 돌아가 경제건설에 참여해야 하겠다는 강한 소망을 갖는다. 


그는 한국이 경제개발 2차 5개년계획을 시작한 1966년 1월 자본금 1천만원으로 고려합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일본에서 화학섬유분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그중에서도 폴리프로필렌 단섬유(P·P S/F)에 관한 정보를 많이 수집한 그는 과거 직조업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섬유산업의 길을 자신있게 선택했다.

 

마침 정부가 경제개발차원에서 이 분야의 사업도 독려했는데 아무도 희망자가 나서지 않으면서 그가 사업을 맡게 됐다. 회사 창립 다음날부터 경제기획원과 은행 등으로 뛰어다니며 차관도입에 매달렸고 마침내 180만달러의 차관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즉시 의왕시에 공장부지를 마련, 하루 2.5t 생산규모의 공장설비를 갖췄다.

 

▲ 1968년 폴리프로필렌 고려합섬 안양공장 연내 준공을 앞두고 기계설치 마무리 작업 모습   © TIN뉴스

 

1968년 12월, 국내 최초로 P·P단섬유로 만든 화학 이불솜을 생산했는데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독점기업이었던 만큼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회사가 본궤도에 오르고 공장규모도 확장됐지만 새로운 제품을 개발한 일본이 턱없이 비싼 로열티를 요구하고 기계설비비 역시 지나치게 비싸게 받는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당시 국내 기술 기반이 전무하여 대부분의 섬유업체들은 외국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 더욱이 수입 원료와 수입 기계를 이용하여 손쉽게 이윤을 내자는 기업경영 풍토도 팽배한 시기였다.

 

“우리도 기술을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기계는 자체 제작할 수 없는 것일까” 그는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몰두했다. 혁신의 의지로 공장설비의 국산화에 나서며 현장에서 직접 진두지휘한 결과, 마침내 국산화된 기술과 기계로 제2라인이 돌아가는 감격을 맞게 된다.

 

▲ 1981년 은탑산업훈장을 받은 고려합섬 생산모습. 고려합섬은 작년보다 165퍼센트 늘어난 1억 4천만 달러를 수출해 200억 불 돌파에 기여했으며, 품질관리를 통한 새로운 상품 개발하여 아프리카와 중남미지역 시장 개척으로 수출시장을 다변화하는데 성공했다.  © TIN뉴스

 

국산 기술로 만들어낸 신제품 ‘해피론’ 이불솜은 오히려 일본으로 역수출돼 사세신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는데 당시 국내 시장은 한계가 있었던 반면 일본의 잠재고객은 무궁무진했다.

 

합섬섬유공장을 국산화한 것에 용기를 얻은 그는 1974년 나일론중합공장의 국산화에 또다시 도전했다. 나일론중합공장의 국산화 시도는 워낙 규모가 큰 만큼 실패하면 회사가 흔들릴 정도의 대모험이었지만 과감하게 도전, 90%이상 국산화에 성공한다.

 

대기업도 못한 일을 중소기업이 이루어냈다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정부기관 관계자들과 기업체 대표들에게 고려합섬 안양공장을 견학하도록 지시할 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는데 이때의 공로로 1976년 대통령 국산화 단체표창을 수상했다.

 

회사가 본격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기업은 운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성장되는 것”이며 “갖가지 어려움이나 난관도 기업성장의 장애요소가 아니라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는 경영철학을 체험하게 된다.

 

▲ 1981년 수출 200억불 돌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은탑산업훈장을 받는 장치혁 고합그룹 회장  © TIN뉴스

 

1980년 고합그룹의 회장에 취임한 그는 ‘창의·끈기·성취’란 사시에 따라 석유화학 정밀화학 유전공학 등의 분야에 속속 진출, 종합화학업체로서의 변신을 꾀하는 한편 울산공장에 구조재구축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종전의 공장개념과 전혀 다른 이 설비는 엄청난 투자와 새로운 기술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는데 1991년 구조재구축공장의 완공으로 고합은 제조업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이것은 국내 최초로 공장의 모든 공정, 즉 원료반입, 운반, 생산, 저장, 판매, 출하 등을 혁명적으로 개혁했다는 점에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 고합은 미쓰이석유화학으로부터 배운 시스템엔지니어링과 PERT 기법 덕분에 우리나라 최초로 플랜트(Plant) 국산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공장이 지금의 롯데케미칼 울산 공장이다.  © TIN뉴스

 

특히 플랜트 국산화를 통해 축적한 독자적인 기술을 활용하여 울산단지 내에 국제경쟁력을 갖춘 구조조정 종합 콤플렉스를 1997년에 완공하였다.

 

또한 국내 최초로 합섬 플랜트를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는 물론 중동 지역까지 수출하여 기술 수출국가로 뻗어나가는 데 일조하였다.

 

화학섬유회사로는 최초로 1973년 8월에 기업 공개를 실시하여 기업의 공공성을 실천하였으며, 1987년에는 자율책임경영제도를 도입하여 창업자로서 기업지배자보다는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역할에 더 충실해, 그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참경영인상, 신산업 경영인대상, 한국경영인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1993년에는 △수출진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중국과의 수교와 경제교류에 공헌하고 △러시아와의 협력증진, 북한과의 경제협력 촉진 등에 앞장섰다는 공로로 한국무역학회로부터 제4회 무역인대상을 수상했다.

 

1995년에는 한국기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시아생산성기구(APO)가 수여하는 아시아.태평양 생산성 대상을 수상했다.

 

▲ 2016년 1월 고합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장치혁 회장과 내빈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TIN뉴스

 

1966년 1월 창업한 고려합섬은 이후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하면서 98년 초까지 13개의 계열사, 연매출 4조2000억원을 기록하는 재계 17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91년부터 사업다각화에 주력하며 1993년 미국 뉴욕 라이프와 합작해 고합뉴욕생명을 세우고, 1994년 이스턴전자통신을 인수하기도 했다. 1995년 고합물산 의류사업부를 발족해 ‘예씽’ 브랜드로 패션사업에도 진출했다.

 

다른 한편 1991년부터 대북 사업과 북방 사업에 손을 대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유적지를 조사하고 시베리아 가스 공동개발 등을 했으나, 내실보다 외양에 주력하다가 1997년 외환위기 후 이듬해 국내 대기업 중 처음으로 워크아웃 대상 기업이 됐다.

 

▲ 고합그룹은 1997년 외환위기 후 이듬해 국내 대기업 중 처음으로 워크아웃 대상 기업이 됐다.  © TIN뉴스

 

1998년 한일은행 등 채권단으로부터 융자를 받으며 이듬해 ㈜고합-고려종합화학-고려석유화학 3사를 합치는 등 구조조정을 했으나 정상화가 제대로 안 돼 2001년 사실상 그룹이 공중 분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장치혁은 20세기 후반부에 활약했던 한국 유수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 북방 경협의 일선에서 백방으로 노력했다. 특히 YS 정부 때는 1992년 한국 기업인 최초로 북한을 공식 방문하고 이후 여러 차례 북한을 찾아 경협 등을 논의했다.

 

▲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전경련 남북경협위원장 자격으로 대통령을 수행했던 장치혁 회장  © TIN뉴스

 

DJ 정부 시절인 2000년 6월 15일 열렸던 역사적인 남북정상(김대중-김정일) 회담에도 전경련 남북경협위원장 자격으로 대통령을 수행했다. 현대아산이 맡게 된 금강산개발 사업도 당초 장치혁이 맡는 것으로 일이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치혁은 “기업은 사물이 아니며, 사물로 봐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기업이념으로 친인척이 단 한 명도 없는 회사, 친인척과 거래가 없는 회사, 가족 상속자가 없는 비혈연 가족회사로 만들어 기업 지배구조 선진화와 투명경영을 모범적으로 실천했다.

 

또 “기업은 사회화, 국민화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문화, 교육, 사회사업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전개, 고려학술문화재단을 통해 한국독립운동사 이론정립과 발굴, 심포지엄 개최, 장학사업 등을 지원하고 있다.

 

▲ 2017년 섬유패션인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좌측에서 네번째)   © TIN뉴스

 

장치혁은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및 부회장으로 30여 년간 활동하였으며, 한·러시아극동협회장, 경제인총협회 수석부회장,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등으로 민간경제계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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