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32 - 송월타월 창업주 박동수

“사람이 곧 재산이다”

TIN뉴스 | 기사입력 2021/03/16 [19:10]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송월타월 창업주 

박동수(朴東洙) 

1918~2002

 

▲ 송월타월 창업주 박동수 ©TIN뉴스

타월산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일본업체들이 국내에 들어온 후 1930년 평양의 세창양말공장에서 ‘HARADA70’ 타월직기를 도입, 테리직물을 제직한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그 뒤를 서울의 한성타월이 26대, 대구의 남선타월이 40대, 부산의 조선타월이 40대와 한국인 경영의 평양 청도타월이 40대의 직기로 각각 타월 생산에 나섰다.

 

6.25전쟁 이후 타월산업은 순수한 국내자본과 기술로 재건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이나 발로 작동하는 구식 목직기가 생산설비의 대부분을 차지해 산업이라기보다는 영세 가내수공업 수준에 머물렀다.

 

또 당시에는 타월이라는 개념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아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물을 흡수하는 양이 타월에 비해 떨어지는 소창이나 광목을 주로 사용했다.

 

이후 폐기된 면직기를 타월직기로 개조, 동력화 직기로 영세한 기업들에게 점차 일반화되면서 타월산업은 하나의 산업분야로 발전한다.

 

국내 타월산업을 대표하는 송월타월의 역사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송월타월 창업주 박동수 회장은 경북 청송군 출신으로 동생 박찬수와 함께 부산에 정착, 1945년 적산가옥으로 불하받은 부산 동구 범천동 자택에서 양말 염색공장을 차린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양말을 표백해 되파는 일을 하며 사업가로서의 첫 발을 뗀 박동수 회장은 이때 미군부대를 통해 처음 타월을 접하게 된다.

 

루프(고리)가 있는 원단의 부드러운 촉감과 탁월한 흡수력에 놀란 박동수 회장은 곧바로 타월 제조에 관심을 갖는다.

 

마침 친척 중 타월 기술자가 있어 1949년 10월 목직기 5대와 송월타월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에서 본격적으로 타월 제조에 뛰어든다.

 

경제 성장과 더불어 국민생활의 안정과 향상으로 회사 설립, 공장 기공, 체육대회 등의 각종 행사가 활발해지면서 값이 저렴하고 실용적인 타월이 기념상품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시설의 노후와 낮은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수요의 팽창으로 타월산업이 안정적인 성장을 이뤄내면서 1964년 당시 33개에 불과했던 타월업체 수는 1965년에는 61개사로 늘어났다.

 

생산시설도 타월역직기 230대, 수족기 189대에서 타월역직기 2천대로 10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러면서 8시간 작업기준의 연간 생산능력도 562톤에서 4644톤으로 1년 사이 7배 이상의 신장세를 보였다.

 

▲ 1967년 송월타월 신문광고  © TIN뉴스

 

당시 국내를 대표하는 타월업체로는 서울에 ‘한성타월공업사’ ‘동아타월공업사’ ‘성림직물공업사’ 부산에 ‘송월타월공업사’ ‘부산타월공업사’ 등이 일본, 싱가포르, 동남아시아 등에 수출할 정도의 생산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송월타월은 해외 유명제품과 견줄 정도의 다양한 디자인과 독보적인 기술력을 확보해 아름다운 색상과 부드러운 감촉이 뛰어난 송월타월의 제품은 유사품까지 범람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송월타월은 1961년 서면공장에 이어 1966년 부산 동래구 사직동에 대규모 공장을 설립한다. 1966년 수출품 생산지정업체로 지정됐으며, 1975년 주식회사로 법인을 설립한 후 1979년 ㈜극동타월(사상공장)을 인수, 흡수합병하며 생산시설을 확대해 나갔다.

 

이후 직원 수만 1천명이 넘는 국내 최대 타월업체로 성장한 송월타월은 1986년 전 공정에 걸쳐 자동화시스템을 구축하고 100% 자체시설로 생산, 품질관리에 있어서도 세계 어느 업체보다 더 우수한 면모를 갖춰나갔다.

 

또 해외에 기술진을 파견하여 신속하게 외국기술을 도입하는 등 신제품 개발에 주력했으며, 품질향상을 위해 최고급 면사만을 사용하고 우수한 연구실험실과 철저한 품질검사로 미국, 영국, 독일, 캐나다, 스웨덴, 일본 등 해외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타월업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송월(松月)’이라는 이름은 별다른 광고 없이도 기념품을 찾는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타월의 대명사가 되었다.

 

▲ ‘송월(松月)’이라는 이름은 별다른 광고 없이도 기념품을 찾는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타월의 대명사가 되었다.  © TIN뉴스

 

특히 동그라미 안에 소나무와 달이 어우러진 상표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지도가 매우 높아 송월타월의 대리점이 아님에도 타월을 취급하는 상점은 송월타월 상표를 내다 걸었다.

 

한편, 국내 타월산업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고 발전의 기틀을 잡은 것은 1965년 2월 한국타월공업협동조합이 설립된 이후라 할 수 있다. 당시 섬유산업의 호황과 함께 타월업체들도 최신 면직기를 들여오는 등 시설의 근대화를 본격화했다.

 

박동수 회장은 한국타월공업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설립 당시 난립되어 있던 타월업체들을 회원사로 가입시키는 동시에 업계의 현안이었던 시설 개체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초창기 타월업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사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중요한 현안이 있을 때 마다 자문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등 타월업계의 산증인이자 대부(代父)로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 1974년 송월타월 광고  © TIN뉴스

 

타월업계가 1976년 1천만 불이 넘는 수출을 기록하면서 섬유산업이 우리나라 경제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성장할 때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지속된 유가인상과 고물가, 경제성장에 따른 인력난이 심화되면서 채산성이 악화되었고, 시설과 기술의 낙후로 국제경쟁력이 약화되면서 1976년을 정점으로 수출은 지속적으로 둔화됐다.

 

1990년대 초부터 중국과 동남아에서 들어온 저가 타월과의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면서 1980년대 사상 최대 호황기를 누리며 국내시장의 40%를 차지해온 송월타월의 상승세 역시 꺾어지게 된다.

 

매출액은 1990년 178억 원에서 1991년 204억 원, 1992년 230억 원으로 확대됐으나 대내외적인 경영환경의 악화로 수지가 예전 같지 않으면서 당기순이익은 오히려 3~4억 원에서 2억 원대로 줄어들었다.

 

특히 경제 성장과 함께 선물이라는 개념의 단가가 굉장히 높아져 전자제품이나 커피포트 등을 선호하면서 선물로 각광받던 타월의 소비량이 크게 감소했다.

 

중국산 저가제품의 수입 범람 속에 1992년 말 동생인 박찬수 회장이 취임하고 조카인 박병대 전무(현 회장)가 합류하면서 송월타월은 영문이니셜을 사용한 새로운 심벌마크를 제정하는 등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다.

 

▲ 지난 1월 어린이 교통안전 릴레이 챌린지에 동참한 송월타올 박병대 회장  © TIN뉴스

 

또 사원들의 의식개혁을 위해 인사정책에 있어서도 기존의 연공서열제 대신 능력평가제를 도입하는 혁신적인 조치를 단행하고, 부서 또는 개인 단위로 철저한 책임 목표제를 시행, 이의평가를 대우와 승진에 철저히 반영시켰다.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는 첨단 자동화직기를 늘려가는 동시에 기술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가로·세로가 2~3m에 달하는 순면침대시트와 수분흡수력이 기존제품에 비해 5배나 강력한 하이테크 헤어드라이타월 등의 신제품 개발에 성공한다.

 

1993년에는 전국 98개 대리점이 ‘협송회(協松會)’라는 모임을 구성, 중국산 제품이 가져다주는 높은 이윤을 포기하는 대신 고급면사를 사용하는 송월타월의 우수한 품질을 소비자들에게 인식시키는데 앞장서는 등 경영혁신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송월타월도 대리점들의 호응에 화답하기 위해 보다 많은 마진율을 제공한데 이어 광고제작 등 적극적인 판매지원책도 마련했다.

 

1996년에는 중국 칭다오에 공장을 설립해 중저가품을 담당하게 하고 부산공장에서는 고급품을 생산하는 전략으로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굳건히 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피해갈 수 없었다. 매출액의 2배에 이르는 빚과 매출의 20%를 넘는 사채 이자가 오랜 기간 누적되면서 매출은 빚을 갚기에 급급했다. 결국 고금리, 채무보증으로 극심한 자금난에 빠지면서 1998년 1월 30일 부도사태를 맞는다. 

 

 ▲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송월타월 살리기 결의대회 © TIN뉴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먼저 박동수 명예회장이 개인 소유 부동산을 매각해 이자율이 높은 사채부터 갚아 나갔다. 130여개에 달하던 대리점들도 ‘송월타월살리기추진운동본부’를 세우고 제품을 받기도 전에 20억 원 정도의 선수금을 내면서 “누구 맘대로 망하냐”며 용기를 북돋웠다.

 

또 재고 소진에도 대리점들이 자발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 당시 불황으로 타월소비가 감소한 때였지만 상황이 풀리면 판매할 수 있는 제품을 우선으로 주문했는데 무려 10억 원의 제품이 팔려나갔다.

 

송월타월은 우리나라 타월업계의 산증인이자 역사로 오랜 기간 쌓아온 브랜드 가치가 대리점에게는 자부심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조성됐다. 

 

회사 살리기에 직원들의 노력도 가세했다. 불량률 반감 운동에 나서는 등 “먼저 회사가 살아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고 모두가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 2~3회씩 분임조 활동을 벌여 스스로 근무시간을 주4일로 줄였고 노동시간이 줄었다며 월급을 30%씩 자진 감봉했다.

 

또 송월타월도 화의가 진행된 5년 동안 종업원 수가 500여명에서 300여명으로 크게 줄어들었지만 조정되는 인원을 가능한 한 관련기업으로 전적시킴으로써 강제적 해고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회사의 노력과 진지한 협의태도로 인해 노동조합도 회사의 결정을 이해하고 따라주었다.

 

▲ 1966년 세워진 송월타월 부산 동래구 공장  © TIN뉴스

 

이외에도 정부가 내놓은 기사회생 정책을 활용해 부산 동래에 본사공장과 사상공장 등을 팔아 부채를 갚았다. 그 뒤 31억을 시설 확충에 투자하고 디자이너 14명과 제품설계사를 신규 채용해 제품고급화로 승부수를 던졌다.

 

높은 품질의 타월을 제조하는 고급화 전략을 통해 선보인 고급타월 샤보렌이 히트를 치면서 2001, 2002년 연속 흑자로 돌아섰고 송월타월도 빠르게 정상화됐다.

 

경영자와 대리점주, 직원들 3자가 똘똘 뭉쳐 회사 살리기에 동참한 결과 당기순이익이 2000년 7억, 2001년 40억, 2002년 65억, 2003년에는 71억6천만 원에 달하면서 2003년 4월 30일 부채를 모두 갚고 화의에서 탈출하는 쾌거를 이뤄낸다.

 

당시 화의 절차에 들어가는 기업들이 많이 있었는데 금융권 부채를 1원도 탕감 안 받고 상환한 기업은 송월타월이 유일했다.

 

▲ 송월타월은 고급화 전략을 통해 타월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 TIN뉴스

 

대리점들이 회사 회생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송월타월과 대리점간의 유대감이 끈끈했기 때문인데 창업주인 박동수 회장의 “사람이 곧 재산이다”라는 사람 중심의 경영철학이 배경이 되었다.

 

박동수 회장은 오래할 사람으로 대리점주를 골랐으며 장사가 잘된다고 크게 늘리지도 실적이 떨어진다고 쉽게 바꾸지도 않았다.

 

대리점들도 협송회를 통해 본사와 더 가까워지고 많은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필요한 것을 충족해줄 수 있는 그런 구조를 만드는데 노력했다.

 

여전히 송월타월은 대리점과의 협업을 중시하고 있다. 온라인 마켓시장이 넓어지고 활발해지고 있지만 본사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마켓이 없다. 송월타월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물건을 판매하면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지만 대리점들에게 기회를 넘기고 있다.

 

▲ 송월타월은 2005년 본사를 부산에서 경남 양산시 유산공단으로 옮겼다.  © TIN뉴스

 

송월타월은 2005년 본사를 경남 양산시 유산공단으로 옮기고 2009년에는 베트남 호찌민 시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는 등 탄탄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2015년에는 항공기 복합재료 업체인 영진 C&C를 전격 인수하고 탄소섬유 시장 진출도 선언했다.

 

주요 브랜드인 松月(송월) 뿐 아니라 로베르타, 란체티, 샤보렌, Sweet Heart(스위트 하트), 카운테스마라, 아날도바시니 등을 다양한 브랜드를 선보이며 타월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산 저가 제품의 범람으로 국내 업체의 타월시장 점유율이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송월타월은 품질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의 선두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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