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24 - 한일그룹 및 경남모직 창업주 김한수(金翰壽)

“개인이 아닌 전 국민의 기업을 꿈꾸다”

TIN뉴스 | 기사입력 2020/11/03 [11:27]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한일그룹 및 경남모직 창업주

수당(壽堂) 김한수(金翰壽)

1922 ~ 1982

 

▲ 한일그룹 및 경남모직 창업주수당(壽堂) 김한수(金翰壽)     ©TIN뉴스

한일그룹 및 경남모직 창업주 김한수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중농 김창준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성호공립보통학교를 마친 뒤,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고노하나상업학교(此花商業學校)를 졸업했다. 오사카의 일본인 포목점에 취직해서 사업을 배웠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귀국해 광복 직후 부산 동대신동 공설시장에 포목점을 차렸고, 1년 후 점포를 국제시장으로 옮겨 ‘경남라사’로 개편해 양복지를 팔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직물류와 복지류 도매상을 경영하여 축적한 경험과 자본을 가지고, 1954년 식품과 한천(寒天)을 수출하고 복지를 수입하는 대경산업주식회사를 세우면서 한일그룹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1956년에는 미국 국무부 국제협력처(ICA)가 제공하는 원조 자금을 받아 부산에 경남모직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복지를 직접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출범할 당시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경남모직은 6·25 전쟁 이후 물자가 극심하게 부족하던 시대적 흐름을 타고 창업 4년 만에 방적·염색·가공에 이르기까지 일괄 생산체제를 갖춘 업계 선두 주자로 나섰다.

 

1960년대 들어 세계섬유시장은 화학섬유와 합성섬유의 붐에 들떠 있었고, 원모를 대용하는 아크릴은 나일론·폴리에스터와 함께 ‘마법의 섬유’로 소비자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1960년에 들어 출시한 앙고라 텍스가 공전의 히트를 치자 김한수는 시류에 대응하기 위하여 아크릴섬유에 눈을 돌렸다.

 

▲ 출범할 당시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경남모직은 6·25 전쟁 이후 물자가 극심하게 부족하던 시대적 흐름을 타고 창업 4년 만에 방적·염색·가공에 이르기까지 일괄 생산체제를 갖춘 업계 선두 주자로 나섰다.  © TIN뉴스

 

그는 먼저 1962년 중앙합섬을 세워 모방업과 합섬업을 복합적으로 운영해오다가 1964년 한일합섬의 전신인 한일합성섬유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최대의 섬유회사로 성장시키며 섬유특화 기업집단 한일그룹의 토대를 만들었다.

 

당시 한일합섬의 아크릴 생산은 세계적인 추세에 따른 것이었다. 면이나 양모 같은 천연섬유의 수요가 공급의 한계성에 부딪쳤기 때문에 화학섬유의 개발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김한수는 당시 설립동기에 대해 “일본에 가면 심지어 거지들까지 아크릴 제품을 입고 있다”며 “일본과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볼 때 차이가 나는 먼 나라가 아닌데 우린들 왜 선진 국민들만이 입고 있는 고급섬유제품을 입지 못하겠는가”라며 “이것 말고도 막대한 외화를 절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크릴 생산계획은 무르익었다”고 밝혔다. 

 

 

원자재 국산화로 가득률 높인 ‘근대화의 기수‘

화학섬유 대중화… 기업 최초 수출 1억불 돌파

 

 

1967년 1월 계열사인 한일합섬을 마산으로 이전, 연산 2700톤의 아크릴 섬유 카시미론(Cashmilon)을 생산하는 공장을 준공하며 제2 도약을 선언했다.

 

당시 아크릴제품은 생산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수요가 공급을 앞질러서 시설확장이 필요하였으며, 세계시장을 겨냥하기 위해서는 시설의 국제규모화가 불가피하였다.

 

과거 수입에만 의존하던 카시미론(Cashmilon) 섬유의 국내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300만 달러의 외화를 절약하게 됐으며, 석유와 천연가스를 원료로 제조된 카시미론은 양모와 비슷하게 우아하면서 더 가볍고 세탁하기가 편해서 의류분야의 혁신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한일합섬이 1967년부터 폴리아크릴 합성섬유를 생산하게 됨으로써 국내 의류 수요구조는 커다란 변혁을 일으켰다. 백화점이나 고급상가에서 고소득층들에게만 애용되던 아크릴 섬유제품이 한일합섬의 마산공장가동을 계기로 대중화됐기 때문이다.

 

당시 김한수는 “민족중흥이라는 거대한 목표는 경제개발만으로 가능하고, 경제개발은 맨손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에 수출만이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지름길”이라며 “남의 호주머니를 넘겨보지 않는다는 기업윤리를 앞세워 수출용 스웨터 원자재의 국산대체를 위해 제품을 싸게 팔면서 지난 2년 동안 기업운영에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면서 “하지만 산촌벽지의 아낙네나 어린애들까지 아크릴 스웨터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때 후회 보다는 오히려 보람 같은 것을 느낀다”고 밝혔다.

 

 1967년 한일합섬공업주식회사 마산공장 준공식 © TIN뉴스

 

1969년 1월 김해에 준공한 방적공장을 기점으로 1971년에 서울 구로동 염색공장, 1975년에 수원공장, 1975년에 대구공장을 각각 증설하여 섬유종합메이커로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경남모직은 1967년 국제양모사무국의 울 마크를 획득하고, 1973년 국제양모사무국의 울 브랜드 마크를 획득하여 제품을 공인받았다.

 

1976년 마산 봉암동에 대지 약 13만 8843㎡에 3만 여추의 공장을 완공, 1978년부터 가동하였으며 부산 공장의 5천추를 이전하여 당시 국내 최대 모방직 공장이 되었다.

 

▲ 60~70년대 의생활 변혁 이끈 한일합섬 마산공장  © TIN뉴스

 

신용: 신용은 기업의 생명이다

성실: 성실은 자기완성의 정신이다

창의: 창의는 향상과 발전의 원동력이다

 

이후 경남모직은 한일합섬과 더불어 15개 계열사를 거느린 한일그룹을 탄생시킬 만큼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 경남모직은 박정희 정부의 수출드라이브정책에 힘입어 세계적인 양복지 메이커로 부상했다.

 

1973년 10월에는 아크릴섬유의 기초원료를 자급하기 위하여 정부투자업체였던 동서석유화학주식회사를 인수해 화학산업에 진출했고, 1974년 부국증권을 인수하고 1977년 한효건설을 세워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다. 

 

김한수는 1979년 장남 김중원 한일합섬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킨 후, 자신은 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1982년 8월 16일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일합섬그룹은 1980년대 초반까지 섬유업 위주로 나가다가 김중원 사장이 가업을 이으면서 1986년에 국제상사 등 옛 국제그룹 계열사 5개를 인수했다.

 

그룹명도 ‘한일합섬그룹’ 대신 ‘한일그룹’을 쓰기 시작하면서, 1987년 복합비료 생산 공기업 진해화학, 1989년 동방호산개발 등을 각각 인수해 사세를 확장했다.

 

 <좌측> 수출의 날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한일합섬 김한수 대표, 1979년 장남 김중원 한일합섬 부사장<우측>을 사장으로 승진시킨 후, 자신은 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TIN뉴스

 

하지만 미국이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고 섬유 수입 쿼터제를 실시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고 동남아 국가들이 저렴한 인건비를 무기로 수출시장에 뛰어들면서 이 같은 성장세도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1986년 전포동 공장라인을 마산으로 옮기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1995년엔 공장 터까지 매각하는 등 자구책을 모색했다. 이외에도 고급원단을 이용한 기성복 시장에 뛰어들어 반전을 시도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주력사업 대체/심화 실패, 무리한 기업 확장, 우성그룹 인수 실패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90년대 말 외환위기에 내몰려 한일합섬과 국제상사 등 우량 계열사들이 잇달아 부도를 맞았다.

 

결국 1956년 창업주 김한수가 경남모직을 세운이래, 섬유제국 한일은 2대 42년 만에 그룹이 해체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후 한일합섬은 2007년에 동양그룹에 이어 2016년 유진그룹에 인수되고 2018년 ㈜한일합섬으로 다시 분사했다. 경남모직은 2006년 삼라컨소시엄으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SM그룹 계열사로 편입된 후 거울, 유리 가공, 욕실 가구 분야 기업으로서 직물 제조업은 더 이상 영위하지 않고 있다.

 

한편, 김한수는 일찍부터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1954년에 고향인 오지면에 경일중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을 시작했고, 1974년에는 마산에 국내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종업원을 위해 한효학원 산하에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어린 여공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산학협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 <좌측> 마산 한일합섬 편직쉐타 작업 광경(1976년) <우측> 한일합섬 방직공장 © TIN뉴스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해있는 일본인기업들에 잘 훈련된 여공들이 대거 스카웃당하고 이 자리를 경험 없는 여공들로 대체했지만 화학섬유공업의 역사가 길지 않은 만큼 능력 있는 기술자나 숙련공이 부족해 많은 문제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이에 김한수는 기능공확보를 위한 양성소로 사용할 계획으로 ‘한효학원’이라는 학교법인을 설립했다. 1978년 산학협동의 본보기를 보여준 공로를 인정받아 교육부문의 5·16민족상을 수상했으며, 그 뒤에도 1979년 김해, 1980년 대구와 수원에도 부설학교를 설립했다.

 

1978년 120개 학급반이 있을 정도로 국내 산업인력 양성에 주요 역할을 했던 한일여자고등학교는 현재에도 33개 학급반을 갖춘 경남에서 가장 큰 규모의 특성화고이자 창원 유일의 여자특성화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외에도 김한수는 의료취약지구에 의료시혜를 베풀기 위하여 경상남도 함양군에 안의의원을 설립하였고, 1974년부터 한국소모방협회 회장을, 1977년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각각 역임하며 국내 섬유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박정희 대통령 큰영애 한일합섬 수원공장 시찰  © TIN뉴스

 

섬유수출이 호황을 누리면서 1970년에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이래 1973년 제10회 수출의날에 국내업계에서는 최초로 ‘1억불 수출의탑’을 받았으며, 197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크릴 직조 원단 4종을 개발해 수출에 성공했으며, 1979년에는 ‘4억불 수출의탑’을 수상했다.

 

금탑산업훈장 수상 당시 “미국의 듀퐁사가 일산 350톤, 일본회사들의 평균시설규모가 160~260톤인데 비해 고작 일산 40톤 정도의 능력의 한일이 수출을 잘했다고 해서 훈장 하나만으로 보상하기는 초라한 느낌”이라며 “기업의 일상 활동이 국가 이익에 기여해야하고 서독, 일본 등 선진국이 처음에 수출로 부활했던 것처럼 지금 수출하지 않으면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다”면서 “이점은 모든 기업인이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또 1억불 수출의탑 당시에는 “자원도 식량도 부족한 우리나라가 빌어다 쓴 거액의 외국 빚을 그대로 먹고 입고 소비해버리면 무엇으로 빚을 갚겠냐”면서 “우리 회사만이라도 차관 원리금을 우선적으로 갚고 또 원자재를 산 다음에는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종업원이 먹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수출 밖에 딴 길이 없다”며 수상의 공을 모든 종업원들에게 돌렸다.

 

이어 “국내업체들은 좁은 내수시장을 놓고 과잉시설, 과당경쟁을 함으로써 서로가 불실을 재촉하는 그런 대내적인 사투만을 계속하고 있다”며 “상품의 질을 고급화하고 가격질서를 지켜야지 무모한 덤핑행위 같은 마치 제살을 뜯어먹는 창피한 싸움은 이제 정말 그만두어야 할 때”라며 “우리라고해서 선진 수출국처럼 질서 잡힌 수출풍토를 이루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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