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오영 회장

정홍기(鄭洪基)

1938~ 

 

 ㈜오영 회장 정홍기 © TIN뉴스

㈜오영은 1981년 설립된 섬유용 합성염료 전문제조기업으로 섬유용 염색에 적용되는 반응성염료 분야에서 독자적인 기술 발전을 이뤄내며 국내 반응성 염료 시장 1위, 세계 65개국에 제품을 수출하는 세계 6위의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저성장 산업으로 치부되던 염료산업에서 40년 가까이 한우물을 파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값비싼 외산 염료를 국산화시키면서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내 섬유산업 발전과 국가경쟁력 향상에 이바지해왔다.

 

뒤늦게 염료산업에 뛰어들며 해외업체들이 독점한 국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시작했지만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가르침처럼,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한 결과 성공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인생도, 사업도 선택의 연속이다”

 

㈜오영의 창업주 정홍기 회장은 1938년 경남 진해 출생으로 진해고와 부산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산업대학원과 서울대 AMP 과정을 수료했다.

 

우리나라 최대의 섬유기업 중 하나였던 경남모직 실험실에서 근무하면서 섬유와 염료에 대해 다방면의 지식을 쌓으며 실험실 실장까지 승진했다. 이후 자리를 옮긴 신한모직에도 실험실 실장으로 일하며 계속해서 염료 연구에 몰두했다.

 

▲ 1956년 부산광역시에서 창립되었던 직물 제조업체 경남모직  © TIN뉴스

 

1978년 겨울, 그는 생활의 터전이었던 부산과 국내 굴지의 섬유 기업을 떠나 서울에 있는 소규모 염료 제조기업인 흥일실업 영업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때 약 12년간 염료 연구에만 몰두하고 이제 막 서울에 올라와 지리도 모르던 그가 영업일이라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당시 흥일실업 손창식 회장의 권유가 있었다.

 

손 회장은 영업일이 단순히 물건만 파는 게 아니라 시장의 트렌드를 읽고 고객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해 기술개발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며 개발 경험이 풍부한 그가 적임자라며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손 회장의 예상대로 그는 고객들과 염료산업의 동향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읽어냈으며, 거기에 멈추지 않고 개발 트렌드를 파악해 실험실에 전달해줬다.

 

물건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 영업’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압도적인 실적을 올린 덕분에 흥일실업도 승승장구하며 질주했고 그 역시 회사의 핵심 인재로 올라섰다.

 

하지만 1981년 4월 해외 선진기업들이 덤핑 공세를 펼치면서 과잉 투자와 가족회사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흥일실업은 결국 부도를 맞게 된다.

 

또 다시 인생 최대의 갈림길이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기업인의 길을 걸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981년 5월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그에게 손 회장이 아들이 운영하던 오성화학만은 살려야 한다며 도움을 부탁한다. 갈등에 빠졌지만 사람의 도리라 생각하며 청을 수락하고 영업과 생산관리 담당 상무로 새롭게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1981년 7월 흥일실업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공장장과 실험실 이사, 그리고 2명의 관리직 간부 등 옛 동료 4명이 그를 찾아와 반응성 염료 시장 상황에 대해 묻고 개발과 관련해 조언을 구했다.

 

그는 당시 반응성 염료 시장은 국내 기업들이 개발을 못했기 때문에 수입 제품들의 천국이나 다름없다며 갈수록 의류가 고급화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기술 개발만 된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의 조언에 강한 자신감과 함께 돌아간 옛 동료들은 수일이 지난 후 그를 다시 찾아와 함께 사업 할 것을 제안했다.

 

“기술과 생산, 관리까지 모두들 호흡도 잘 맞고 경험도 많다” “언제까지 샐러리맨만 할 건 아니지 않느냐” “아무리 좋은 제품을 개발해도 영업이 안 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영업을 잘 아는 사람 없으면 사업을 시작할 수 없다”며 그를 설득했다.

 

기술 영업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마음 속 깊숙이 새로운 뜻을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강해졌다.

 

수입 제품들이 판치는 반응성 염료 시장에서 국산품을 개발한다면 국가에도 도움이 되고, 시장 석권까지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자 새 사업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이것은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큰 결단이었고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창업 동지들이 5명으로 시작하니 회사명을 숫자 오(五)자와 영화 영(榮)자를 써서 ‘오영’으로 하자고 제안했고, 외국인들도 부르기 좋다고 공감하면서 오영산업으로 회사명이 결정됐다.

 

외산이 판치는 염료 시장에 새바람을 일으켜 보자며 큰 뜻을 안고 일사천리로 추진된 사업이었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한시라도 제품을 빨리 생산하기 위해서는 공장 마련이 시급했지만 새로 건설하기에는 시간도 없었고 자본도 턱없이 부족했다.

 

 ㈜오영 문산 공장 전경 © TIN뉴스

 

전국을 돌며 매물을 수소문한 결과, 경기도 문산의 안료 공장의 인수를 결정한다.

 

당시 높은 가격이 아니었지만 이전 회사에서 퇴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황에 신설 회사라 자금도 빌릴 수 없어 인수에 필요한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다.

 

게다가 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없다 보니 그들이 책임지기로 한 몫까지 상당 부분을 그가 맡아야 했다. 그렇다고 20% 지분을 나누기로 한 동업 정신을 훼손할 수 없어 나머지 네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형식을 취했다.

 

결국 어려움 속에 가까스로 공장을 인수한 후 10여 명에 이르는 직원들을 고용하고 수 주일에 걸쳐 공장 설비와 기계를 정비해 생산 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당시 시장 상황을 생각하며 반응성 염료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 섬유산업에도 고급화 바람이 불며 면니트 등이 경쟁력을 갖추면서 대거 미주 지역으로 수출이 시작됐고 반응성 염료가 니트 생산에는 반드시 필요했기에 시장 수요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 당시 반응성 염료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 국산화가 된다면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사업 초기 주요 품목으로 반응성 염료를 지정했던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업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기술과 생산을 책임지기로 한 동업자들이 반응성 염료 개발에 들어갔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당시 기업인들이 ‘반응성 염료 개발’이 업계의 주요 과제라고 대통령에게 보고할 정도로 우리 기술 수준에서 봤을 때 무모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개발은 둘째 치고 언제 생산될지도 모르는 반응성 염료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우선 오성화학에서 취급했던 경험을 살려 쉽게 생산할 수 있는 계면활성제 품목을 먼저 시장에 출시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계면활성제는 염색 조제용이나 정련제 등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수입품이 시장을 주도했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계면활성제 판매가 순조로우면서, 창업 3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섰고 초창기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다.

 

자칫 회사의 존립도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의 빠른 결단이 빛을 발휘한 것이다.

 

▲ 정홍기 회장과 연구원의 의견 교환 모습(사진제공 ㈜오영)  © TIN뉴스

 

제품 개발이 없다면 오영산업도 없다

 

하지만 반응성 염료 개발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위기에 빠질 것은 확실했다. 무엇보다 우리 기술력으로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걱정에 빠졌다.

 

1982년 그는 유일한 해결 방안이 일본 기술진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 판단하고 흥일실업 시절에 만났던 일본의 한 기술자를 찾아 동업자들과 일본으로 향한다.

 

하지만 과거 인연을 맺었던 손 회장의 승낙이 아니면 도와줄 수 없다는 의리에 찬 답변만 듣고 허무하게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깊은 절망에 빠졌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급한 대로 일본 선진 기업들이 생산한 반응성 염료를 입수하고 기술진들이 다각도로 제품을 분석하고 응용해 반응성 염료 개발에 성공한다.

 

선진국 품질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당시 우리 기술 수준에 비추어 본다면 놀랄만한 진보였다.

 

하루에 300㎞ 거리를 찍는 일이 다반사 일정도로 전국을 누비며 영업에 매진했다. 과거의 거래처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의 신용과 사람 됨됨이를 믿고 제품을 주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거래처를 찾은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거래처 사장 손에는 물이 줄줄 빠진 옷들이 들려있었다. 즉시 문산 공장으로 달려갔지만 동업자들은 군용 담요를 펼쳐놓고 화투판을 벌이고 있자 화가 치밀었다.

 

물이 빠진 섬유들을 그들 앞에 내밀면서 뻔히 안 되는 길을 굳이 갈 거면 뭐하려고 동업하자고 했냐고 다그쳤다. 같은 사장끼리 너무 하는 것 아니냐고 대꾸하던 동업자들도 그때서야 고개를 숙였다.

 

상황은 종결되었지만 제품 수준을 높이지 못하고 동업자들의 마인드가 변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미래를 기대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이 자리했다.

 

▲ ㈜오영에 초빙된 해외 기술자들  © TIN뉴스

 

제품이 완벽해지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찾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조언을 간곡히 구하는 그의 열정에 결국 다시 찾은 일본의 기술자의 마음이 열렸고 반응성 염료를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기로 수락한다.

 

일본 기술진의 합류가 큰 힘이 되면서 직원들의 사기도 올라갔다.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일념 아래 마침내 창업 후 1년만인 1982년 국내 최초로 Suncion H-E와 Suncion P 트리아진계 반응성 염료를 개발·생산하는 데 성공한다.

 

반응성 염료 생산 소식에 수입품만 찾던 섬유업체들로부터 주문이 이어지는 등 시장에도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후 오영산업의 기술은 일취월장했다. 봇물이 터진 기술력 덕분에 오영산업의 품질은 한 단계씩 높아졌다. 1985년에는 포마진 블루 색소를 개발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는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이룬 쾌거이기도 했다.

 

후발 주자에서 단숨에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전체 염료에서 국내 염료 산업의 효시인 이화산업을 제치고 2위로 도약했고, 반응성 염료에서는 부동의 1위 자리를 굳히게 됐다.

 

▲ ㈜오영 시화공장 전경  © TIN뉴스

 

선견지명으로 경제 위기, 환경, 세계 시장까지

 

오영산업은 문산 제1공장에 이어 시화 제2공장과 중앙연구소를 세우면서 국내 반응성 염료 시장을 석권하는 쾌거를 이뤘다.

 

부동의 1위 자리를 굳힌 반응성 염료 외에도 분산 염료 시장까지 진출해 우리나라 염료 시장의 최강자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경제 전체가 타격을 입은 IMF 경제 위기시기에도 오영산업은 무차입 경영 방침에서 비롯된 안정적인 경영 환경을 바탕으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또 환경친화적인 반응성 염료 제조 공정을 개발해 실용화함으로써 염료 산업의 문제점으로 대두되던 합성 폐수 처리 방법도 개선하는 등 친환경 경영을 시작했다.

 

1995년에는 국내 염료업체로는 최초로 유럽 ETAD 회원으로 가입하고 1999년에는 독일 TUV 사로부터 환경 관리 인증인 ISO 14001 획득 및 친환경 경영체제를 구축하고 2004년에는 공정 안전 관리(PSM) 인증까지 획득했다.

 

2007년에는 네덜란드 Control Union 사로부터 GOTS(Global Organic Textile Standard) 규격 인증을 획득함으로써 규제물질이 함유되지 않은 친환경염료제품 생산업체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2008년에는 국가환경경영대상 환경부장관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에는 영국 UKAS 사로부터 ISO 14001, ISO 9001, OHSAS 18001 인증을 획득하여 환경경영시스템, 품질경영시스템 및 안전보건경영시스템을 구축하고, 스위스 Bluesign Technologies사로부터 Bluesign 시스템 파트너 인증을 획득한다. 2013년에는 ISO 50001 인증을 획득하여 에너지 경영 시스템도 구축한다.

 

▲ 2011년 명예의 전당 헌정식에서 정홍기 회장(좌), 조준희 기업은행장  © TIN뉴스

 

이러한 오영산업의 승승장구와는 달리 국내 염료 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중국이 염료 제조를 시작하면서 염료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값싼 인건비를 무기로 한 중국 염료 제품이 국제 시장을 휩쓸었고, 국내에서 환경 비용이 점차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국내 업체들의 수출은 부진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다수 기업이 활로를 찾아 인건비와 환경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이러한 흐름에 따르지 않았다.

 

중소기업이 자기 텃밭인 국내에서 수성하지 못한다면 어디를 가도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인건비 절감이나 막연한 환경 비용 절감에 대한 기대만을 가지고 생산 기지를 해외로 이전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3년도 되지 않아 놀라운 결과로 나타났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중국이 대대적으로 환경 규제에 나서면서 제조 기반이 거의 중국으로 건너간 분산 염료의 수입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 세 배까지 올랐다.

 

반면 국내에 제조기반을 유지하던 반응성 염료는 상대적으로 국내 소비자 가격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반응성 염료의 가격 안정화 배경에는 선견지명을 가진 그의 탁월한 선택이 주요했다.

 

2014년에는 ㈜오영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중소기업청으로부터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선정됐으며, 무역의 날에는 1억 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2016년에는 반응성염료가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됐다.

 

 ㈜오영은 1992년에 처음으로 1,0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한 이후 10년이 지난 2002년에 2,000만불 수출을 돌파했다. 그리고 다시 8년 만에 5,0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 TIN뉴스

 

정홍기 회장은 “우리 ㈜오영은 장인 기업으로서 ‘명품 제품’을 추구하고 있다”며 “비슷한 제품이 많아도 1%의 차이 때문에 ‘명품’이 인정받는 것처럼 섬유 화학 분야 염료 제품의 명품을 만들기 위해 그 1%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며 “염료 부분의 새 영역 개척을 위한 연구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늘 지켜왔던 가치들로 ‘인생도, 사업도 선택의 연속이다’라는 것과 ‘형직영정(形直影正)’ 등을 꼽는다. 형직영정은 자신이 바르게 행동해야 직원들도 올바로 행동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치관으로 세웠다.

 

그러나 ‘우공이산(愚公移山)’이야말로 그가 걸어온 길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며 ㈜오영이 염료 산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공이산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말했다.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정홍기 회장은 ㈜오영을 통해 몸소 증명하고 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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