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金宇中)

(1936~2019) 

 

 ▲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金宇中)

김우중은 1936년 대구에서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대구사범에서 교편을 잡던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15세부터 홀어머니 아래서 소년가장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왔다.

 

휴전 후 상경해 경기중‧고등학교를 거쳐 1956년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60년 대학 졸업 후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입사해 6년간 경력을 쌓았다.

 

무역부장 시절인 1967년 32세의 나이로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과 자본금 500만원을 공동출자해 서울 충무로(동남도서빌딩 401호)에 10평 남짓한 사무실과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이때 만들어진 대우실업의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이후 ‘세계경영’과 ‘샐러리맨 신화’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대우실업은 창업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tricot, 경편직 메리야스 편물) 한 품목으로 우리나라 전체 트리코트 수출의 11.2%에 달하는 58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판매에 나선 김우중에게는 ‘트리코트 김’이란 별칭이 붙었다. 또 동남아시아에서는 대우의 첫 브랜드 ‘영타이거’에서 유래한 ‘타이거 킴’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부산 지역에서 성장된 대우실업은 1980년에 2만 명에 이르는 종업원을 고용했다. © TIN뉴스

 

창업 이듬해인 1968년 10월 부산 동래구 온천동 공장에 100여 명의 종업원으로 트리코트를 생산하기 시작해 298만 달러 수출액과 1700만 원 이익을 남겼다.

 

1968년 수출 성과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이를 발판으로 1969년에는 한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해외(호주 시드니) 지사를 세웠고,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갔다.

 

1969년 세창직물로부터 연산 공장을 인수하여 원단 염색과 가공을 시작했으며, 1970년에는 동남섬유공업의 온천장 공장을 인수, 의류 봉제품을 직접 생산했다.

 

1972년 8월 남양산업의 양정 공장과 반여 공장을 인수하면서 부산 지역에서만 모두 5개의 섬유 공장을 보유했다.

 

1972년에 미국 정부의 섬유 수출 쿼터제가 실시되자 대우실업은 섬유 수출 실적 기준에 따라 전체 쿼터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물량을 확보했다.

 

▲ 부산 지역에서 성장된 대우실업은 1980년에 2만 명에 이르는 종업원을 고용했다.  © TIN뉴스

 

1975년에 부산 동래구 온천동의 제1·2공장에서는 와이셔츠를 생산했고 종업원은 1,973명이었다. 또 금정구 금사동의 공장은 720명의 종업원이 자켓, 바지, 기성복 등을 생산했다.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었던 부산 제5공장은 3,031명의 종업원이 주로 원사와 편직을 담당했는데 76만 달러를 투입하여 야외복 공장을 설립하고, 봉제기 1,896대를 설치하는 등 시설을 확장했다.

 

1977년에는 고려피혁 공장이 있던 동래구 연산동 공장에서 인조 피혁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 동래구 온천동 공장에서 가방을 생산했고, 동래구 연산동의 제3공장에서는 주로 텐트와 백팩을 생산했으며, 반여동의 부산공장에서는 봉제품과 텐트를 주로 생산했다.

 

또 동래구 제5공장에 있는 수출 물량 하치장과 수영에 있는 잡화류 공장을, 양산 공장을 신축해 이전했다. 1981년에는 재단 과정을 자동화하여 부산 공장에 설치하였다.

 

1981년 하반기부터 ‘부룩소’라는 브랜드의 기성복 분야에 진출하여 부산 공장에서 셔츠를 생산했는데 당시 부산 공장 전체의 종업원 수는 2만여 명에 달했다.

 

1986년부터 자동차 시트 원단 및 커버를 생산했다. 1990년에는 부직포 생산을 시작했는데 셔츠를 생산하던 부문이 자동화되면서 인력이 감축되었으며, 주요 업종이 저부가가치 봉제 산업에서 시트 원단, 시트커버, 부직포 등으로 전환됐다.

 

▲ 1972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수출훈장을 받고 있다.  © TIN뉴스

 

5대양 6대주 누비며 세계를 경영한 민족주의자

 

대우실업은 1972년 11월에 제9회 수출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고, 1975년에 종합 상사로 지정됐다. 1976년 에콰도르, 1977년 수단, 1978년 리비아에도 연속적으로 진출하며 승승장구하는 등 세계경영의 시작을 알리며 종합상사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다.

 

1970년 대우실업 사장 자리에 오르며 본격적인 경영인의 길에 들어선 김우중은 1970년대 초반부터 인수합병과 업종변경 등의 과정을 거쳐 중공업과 자동차, 조선, 전자, 통신, 금융, 호텔, 서비스 등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대우그룹 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1982년 1월 대우그룹의 모기업 격인 ㈜대우를 출범시키면서 창업 15년 만에 자산 규모 국내 재계 4위에 올랐다.

 

1980년대 중반 한때 대우조선 경영악화와 노동쟁의 등 난관에 부딪히며 부도설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1980~90년대 내내 세계경영을 화두로 성장일변도 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동유럽이 몰락하자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였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김우중 회장은 1년에 280일을 해외에서 체류하는 ‘세계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 TIN뉴스

 

그러한 노력 끝에 1993년 2만2천명의 해외고용인력과 185개의 해외 네트워크는 1998년 15만명과 396개(현지법인 포함 시 589개)로 급증했다. 글로벌 기업의 위상에 맞게 김우중 또한 1년에 280일을 해외에서 체류하는 ‘세계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1998년 대우그룹 수출액은 186억달러로 당시 국내 수출액(1323억달러)의 14%나 차지했으며, 자산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에 이르렀는데 이는 현대에 이어 재계 2위를 차지했다. 그해 11월에 한국 종합 생산성 대상을 수상했다.

 

1997년 발생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1998년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의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 한도 제한 조치에 따라 회사채 발행에 제동이 걸리며 대우그룹은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

 

1999년 말까지 그룹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대규모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대우그룹 12개 계열사가 워크아웃에 돌입하면서 거대 그룹 대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김우중의 세계경영 신화도 막을 내리게 됐다.

 

 대우그룹은 1980년대 중반 한때 대우조선 경영악화와 노동쟁의 등 난관에 부딪히며 부도설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1980~90년대 내내 세계경영을 화두로 성장일변도 전략을 구사했다. © TIN뉴스

 

대우그룹의 부도 직전까지 ‘불굴의 기업가’로 통한 김우중은 이익을 따지는 장사꾼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먼저 도전하는 ‘황무지 개척자’란 평가를 받는다.

 

그 일화 중 카리모프 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몽골제국의 칭기즈칸에 비유해 ‘킴기즈칸’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부도 위기에 처한 김우중의 구명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 1970년대 중반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진출한 것에 자극을 받아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 진출한 일화도 유명하다.

 

당시 한국과 미수교국이었던 탄자니아에 영빈관을 지어주며 대신 면화를 공사대금으로 받았는데 이를 계기로 양국은 수교까지 맺게 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리비아에서는 도로, 주택, 비행장을 지어주고 대금으로 석유를 받는 등 기발한 착상으로 신시장을 개척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당시 김우중은 “국민 20%가 해외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국민이 산다”며 세계무대로 눈을 돌리자고 강조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89년 펴낸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6개월 만에 100만부를 돌파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하며 지금도 회자되는 역대급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다.

 

 김우중 회장과 YBM 프로그램 참여 학생들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TIN뉴스

 

김우중은 2008년 특별사면으로 출소 후 제2의 고향인 베트남으로 넘어가 후진양성에 힘쓰며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에 주력해왔다.

 

동남아시아 진출에 매진했던 당시의 행보는 현 정부의 신남방 정책과도 궤를 함께하는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우그룹 회장 시절에는 세계경제포럼(WEF)의 자문위원 중 유일한 아시아인으로 기업인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국제기업인상’을 아시아 기업인 최초로 받았다.

 

또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역임했으며, 2019년 12월 9일 수원시 아주대병원에서 향년 83세에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개척자이자, 일중독자, 승부사 등으로 유명한 김우중은 국내 기업이 해외 현지 사업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보여줬다.

 

김우중은 새벽 3시에 기상해 1분 1초가 아깝다며 식사도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선호했다.

 

 대우 출신들은 김우중에 대해 하나 같이 “열정적이었고, 가슴도 뜨거웠다”며 회상하고 있다.  © TIN뉴스

 

대우그룹의 사훈 또한 ‘도전, 창조, 그리고 희생’으로 별 보고 출근해서 별 보고 퇴근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대우 출신들은 그에 대해 하나 같이 “열정적이었고, 가슴도 뜨거웠다”며 회상하고 있다.

 

또 처음부터 중간 관리자나 대리급들을 믿고 그 사람들에게 많은 책임을 줬다. 특히 대리급 직원에게 2000만 달러까지 계약할 수 있는 자율성을 줘 책임의식을 갖고 일을 빨리 처리할 수 있도록 했는데 ‘주인의식과 책임감’은 대우그룹이 추구하는 세계경영의 핵심이 되었다.

 

한편, 2014년 8월 대우그룹 해체 15주기를 맞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는 대우그룹 해체가 경제관료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는 ‘기획 해체론’이 담겨 있어 이목을 끌기도 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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