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런웨이 산증인’ 정소미 대표 영면

서울패션위크·SFAA 컬렉션 등 수천 회 무대 연출…패션산업 성장 견인
모델 전문성·권익 강조하며 KOFMAA 설립…차세대 K-모델 육성 헌신

TIN뉴스 | 기사입력 2026/05/28 [15:32]

▲ ‘40년 런웨이 산증인’ 정소미 더모델즈 대표 별세  © TIN뉴스

 

대한민국 패션모델계와 패션쇼 연출 분야를 대표해 온 정소미(본명 정영숙) 더모델즈 대표가 향년 70세로 영면에 들었다. 5월 28일 별세한 고인은 5월 30일 발인에 이어 삼성개발공원묘원엘리시움에 안치됐다. 형제, 가족 그리고 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정소미 대표는 모델, 교육자, 패션쇼 기획·연출가로 40여 년 가까이 한국 패션산업의 성장 과정과 함께해 온 인물이다. 한국 패션모델 산업의 태동기부터 서울패션위크 시대를 거쳐 K-패션 글로벌화 흐름에 이르기까지 현장을 지켜온 ‘런웨이 연출의 산증인’으로 평가받는다.

 

 

고인은 1980년대 프로 패션모델로 활동을 시작했다. 모델이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전문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 그는 워킹과 메이크업, 의상 연출 등을 직접 교육하며 후배 모델 양성에 힘썼다.

 

국내 최초 모델 교육기관 계열인 국제차밍스쿨에서 워킹 강사로 활동하며 모델 교육의 기반을 다졌고, 1990년대에는 SFAA(서울패션아티스트협회) 컬렉션 모델로 활약하며 한국 디자이너 패션의 성장기를 함께했다.

 

1988년 서울 을지로 쁘렝땅백화점 무대 참여를 계기로 본격적인 패션쇼 기획·연출의 길에 들어선 그는 이후 한국 패션쇼 문화의 수준을 끌어올린 대표 연출가로 자리매김했다. 

 

1999년 설립한 모델 교육기관 겸 에이전시 ‘더모델즈’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모델 교육기관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1세대 패션모델 이희재씨가 운영하던 학원을 이어받아 한국 모델계의 맥을 잇는 공간으로 발전시켰다.

 

정 대표는 단순한 모델 에이전시 운영자가 아니었다. 디자이너의 콘셉트와 철학을 무대 위에서 완성도 높은 예술로 구현하는 통합형 연출가였다. 모델 캐스팅은 물론 무대 디자인, 음악, 조명, 영상, 워킹 디렉팅까지 총괄하며 “패션쇼는 디자이너의 철학을 전달하는 종합예술 무대”라는 신념을 실천해왔다.

 

그의 손을 거친 무대는 셀 수 없을 정도다. SFAA 컬렉션을 비롯해 서울패션위크, 국내외 주요 컬렉션과 기업 패션 이벤트 등 수천 회 이상의 패션쇼를 연출했다. 앙드레김, 루비나, 진태옥, 이상봉, 박윤수, 임선옥, 손정완 등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의 무대를 책임졌고, 2000년부터 2020년까지 서울패션위크 총괄 또는 파트너사로 참여하며 한국 패션산업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 정소미 더모델즈 대표가 2011년 ‘제4회 코리아패션 대상’ 시상식에서 체계적인 패션전문모델 발굴과 육성을 통해 패션전문모델 인지도를 제고시키고 차별화된 기법을 도입한 패션쇼로 기획 연출의 선진화를 선도하며 한국패션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식경제부장관 표창상을 수상하고 있다.  © TIN뉴스

 

특히 1998년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와 함께한 대우 마티즈 론칭쇼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당시 정 대표는 경주 힐튼호텔에서 열린 신차 발표 무대를 총연출하며 기존 자동차 런칭쇼의 공식을 완전히 뒤집었다. 짧은 드레스 대신 단아한 한복을 입은 모델들을 무대에 세웠고, 외국인 관객 300여 명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 무대는 이후 밀라노·런던·바르샤바 등 유럽 순회 쇼로 이어지며 한국 패션과 한복의 가능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교육자로서의 족적도 깊다. 장윤주, 박영선, 민윤경, 정재경, 안소라 등 한국 패션계를 대표하는 톱 모델들을 길러냈으며, 미스코리아 출신 모델들과 수많은 신진 모델들의 성장을 이끌었다. 그는 워킹 기술만이 아니라 표현력과 자세, 무대 태도까지 강조하며 모델의 전문성과 직업의식을 가르쳤다. 우리나라 최초의 모델 입문 교과서인 ‘모델의 이해’를 집필한 것도 그다.

 

정 대표는 늘 모델 산업의 정체성과 지속가능성을 고민했다. “모델의 산업화는 좋지만 전문성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처럼, 모델이 단순한 스타 소비 구조가 아니라 문화예술인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 2022년 사단법인 한국패션모델예술협회(KOFMAA) 발대식  © TIN뉴스

 

그 철학은 2022년 사단법인 한국패션모델예술협회(KOFMAA) 설립으로 이어졌다. 초대 회장을 맡은 그는 패션모델의 권익 보호와 전문성 강화, 문화예술 융합 확대에 힘써왔다. 최근에는 디지털 패션쇼와 시니어 모델 산업, K-모델 글로벌화에도 집중하며 후배 세대의 해외 진출 기반 마련에 노력했다.

 

지난해 개최한 ‘제1회 더 베스트 모델 온 더 런웨이(The Best Model on The Runway)’ 역시 그의 오랜 고민이 담긴 프로젝트였다. 그는 “K-모델이 국내외 무대에서 당당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며 “정통성과 권위를 갖춘 대회로 지속가능하게 이어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 대표는 누구보다 현장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IMF 외환위기 당시 모델 학원이 어려움에 처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도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은퇴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패션이 제 삶이다. 끝까지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생전 그는 “서울은 세계가 주목하는 패션 도시가 될 것이고, 아시아 패션 허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한국 패션산업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굳게 믿었던 그의 열정은 이제 수많은 후배 모델과 패션인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됐다.

 

패션계는 “정소미 대표는 단순한 모델 지도자가 아니라 한국 패션문화의 흐름 자체를 만든 개척자였다”며 “그가 남긴 철학과 무대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애도하고 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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