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섬유산업에 첫 발을 뗀 건 1966년, 올해로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6년 대한공론사 홍콩 주재원과 1958년 중화상사 상무를 거쳐 1966년 1월 자본금 1천만 원으로 고려합섬을 창업했다. 의왕시에 공장부지를 마련, 하루 2.5t 생산규모의 공장설비를 갖췄다. 그리고 국내 최초로 폴리프로필렌 스테이플 섬유를 생산했다.
1968년 12월, 국내 최초로 P·P단섬유로 만든 화학 이불솜(해피론)을 생산했는데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독점기업이었던 만큼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회사가 본궤도에 오르고 공장규모도 확장됐지만 새로운 제품을 개발한 일본이 턱없이 비싼 로열티를 요구하고 기계설비비 역시 지나치게 비싸게 받는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당시 국내 기술 기반이 전무하여 대부분의 섬유업체들은 외국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 더욱이 수입 원료와 수입 기계를 이용하여 손쉽게 이윤을 내자는 기업경영 풍토도 팽배한 시기였다.
“우리도 기술을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기계는 자체 제작할 수 없는 것일까” 그는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몰두했다. 혁신의 의지로 공장설비의 국산화에 나서며 현장에서 직접 진두지휘한 결과, 마침내 국산화된 기술과 기계로 제2라인이 돌아가는 감격을 맞게 된다.
국산 기술로 만들어낸 신제품 ‘해피론’ 이불솜은 오히려 일본으로 역수출돼 사세신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는데 당시 국내 시장은 한계가 있었던 반면 일본의 잠재고객은 무궁무진했다.
합섬섬유공장을 국산화한 것에 용기를 얻은 고인은 1974년 나일론중합공장의 국산화에 또다시 도전했다. 나일론중합공장의 국산화 시도는 워낙 규모가 큰 만큼 실패하면 회사가 흔들릴 정도의 대모험이었지만 과감하게 도전, 90%이상 국산화에 성공한다.
대기업도 못한 일을 중소기업이 이루어냈다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정부기관 관계자들과 기업체 대표들에게 고려합섬 안양공장을 견학하도록 지시할 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는데 이때의 공로로 1976년 대통령 국산화 단체표창을 수상했다.
1980년 고합그룹의 회장에 취임한 고인은 ‘창의·끈기·성취’란 사시에 따라 석유화학, 정밀화학, 유전공학 등의 분야에 속속 진출, 종합화학업체로서의 변신을 꾀하는 한편 울산공장에 구조재구축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종전의 공장개념과 전혀 다른 이 설비는 엄청난 투자와 새로운 기술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는데 1991년 구조재구축공장의 완공으로 고합은 제조업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이것은 국내 최초로 공장의 모든 공정, 즉 원료반입, 운반, 생산, 저장, 판매, 출하 등을 혁명적으로 개혁했다는 점에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플랜트 국산화를 통해 축적한 독자적인 기술을 활용하여 울산단지 내에 국제경쟁력을 갖춘 구조조정 종합 콤플렉스를 1997년에 완공했다.
또한 국내 최초로 합섬 플랜트를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는 물론 중동 지역까지 수출하여 기술 수출국가로 뻗어나가는 데 일조하였다. 화학섬유회사로는 최초로 1973년 8월에 기업 공개를 실시하여 기업의 공공성을 실천하였으며, 1987년 자율책임경영제도를 도입하여 창업자로서 기업지배자보다는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역할에 더 충실해, 그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참경영인상, 신산업 경영인대상, 한국경영인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1993년 △수출진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중국과의 수교와 경제교류에 공헌하고 △러시아와의 협력증진, 북한과의 경제협력 촉진 등에 앞장섰다는 공로로 한국무역학회로부터 제4회 무역인대상을 수상했다. 1995년 한국기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시아생산성기구(APO)가 수여하는 아시아.태평양 생산성 대상을 수상했다.
1966년 1월 창업한 고려합섬은 이후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하면서 1998년 초까지 13개의 계열사, 연매출 4조2000억원을 기록하는 재계 17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91년부터 사업다각화에 주력하며, 1993년 미국 뉴욕 라이프와 합작해 고합뉴욕생명을 세우고, 1994년 이스턴전자통신을 인수하기도 했다. 1995년 고합물산 의류사업부를 발족해 ‘예씽’ 브랜드로 패션사업에도 진출했다.
다른 한편 1991년부터 대북 사업과 북방 사업에 손을 대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유적지를 조사하고 시베리아 가스 공동개발 등을 했으나, 내실보다 외양에 주력하다가 1997년 외환위기 후 이듬해 국내 대기업 중 처음으로 워크아웃 대상 기업이 됐다.
1998년 한일은행 등 채권단으로부터 융자를 받으며 이듬해 ㈜고합-고려종합화학-고려석유화학 3사를 합치는 등 구조조정을 했으나 정상화가 제대로 안 돼 2001년 사실상 그룹이 공중 분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한일·한중 외교 및 남북경협 기여 일등공신
이 과정에서 한일·한중외교와 대북경협에 기여했다. 고려합섬과 관계가 밀접했던 일본 이토추상사 세지마 류조 부회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어 중국 덩샤오핑 주석의 측근 진리 국제우호연락회 부회장 등을 한국에 초청했다.
이어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덩샤오핑 주석에게 전달하고 안재형-자오즈민 결혼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등 한·중수교 전 양국 접촉을 도왔다.
김영삼 대통령의 비공개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드나들며,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만나 금강산 개발, 나진·선봉 개발사업 등 납북경협을 모색했다. 전경련에서 남북경협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6대 섬산련 회장 역임 섬유산업 발전 기여
이후 ▲1989∼200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1989년 한국섬유산업연합회 부회장 ▲1991년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1992년 산업기술진흥협회 부회장 ▲1992∼2001년 한·러시아극동협회 회장 ▲1992년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1993년 한국경영자총협회 수석부회장 ▲1995년 한국섬유산업연합회 명예회장 ▲1998년 민주평통 이북5도 대표 부의장도 역임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17호실(6일 오전 10시부터 조문 가능)에 마련할 예정이고, 발인은 9일 오전 8시, 장지는 남양주 영락교회 공원묘역.
김성준 기자 tinnews@tinnews.co.kr <저작권자 ⓒ TIN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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