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향정 백창기 대표 - 미수곡주 ③

米(미) 산세 으뜸이고 수려한 청정지역 양양의 쌀
水(수) 설악산 깊은 골에서 발원한 물
麯(곡) 오로지 전통 누룩방에서 디딘 밀 누룩만으로
酒(주) 정성을 다하여 빚여 그 맛이 깊습니다

TIN뉴스 | 기사입력 2025/06/09 [20:59]

▲ 초향정 백창기 대표(전 대경모방 사장)가 수 백 번 술을 빚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17년간의 노력과 정성을 다하며 탄생한 양양지역 특산주 米(미)水(수)麯(곡)酒(주)  © TIN뉴스

 

미수곡주는 ​초향정 백창기 대표(전 대경모방 사장)가 수 백 번 술을 빚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17년간의 노력과 정성을 다하며 탄생한 양양지역 특산주다.

 

산세가 으뜸이고 수려한 청정지역 양양의 쌀과 설악산 깊은 골에서 발원한 물, 전통 누룩방에서 디딘 밀 누룩 세 가지 재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첨가하거나 희석하지 않았다.

 

옛 방식을 고수하며 꼬박 한 달 간 정성과 진심을 다하여 빚어 만들어 원주(原酒)는 향(香), 미(味)가 깊어 지난 3월에 강원특별자치도 농수특산물 인증마크를 획득했다.

 

다음은 초향정 백창기 대표가 전하는 전통주 미소곡주 탄생 배경과 우리 전통주에 대한 생각, 전통주를 만들기 전 관심을 가졌던 식초와 발효 과정에 대해 담아낸 글이다.

 

 

식초 이야기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할머니는 추석과 설 명절에는 꼭 술은 담그셨다. 그 과정이야 다 기억을 할 수는 없어도 어렴풋이 더듬어 보려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밀주 단속이 있어 명절 때가 되면 소위 말하는 순사들이 각 고을을 순시하는 경우도 있었고 양조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몰래 마을로 들어와 술 냄새를 맡고 신고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벌금을 무는 등 몇 번씩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일제시대 1907년 조선총독부에서 ‘주세령’을 공포한 것으로 시작하여 해방 이 후 쌀이 부족하여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는 1965년 ‘양곡관리법’이 제정 발표되기까지 계속 되었고 1995년에 이르러서야 가양주 빚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렇게 8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우리의 가양주에 대한 명맥은 끊어졌고 그 문화는 유실 되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할머니는 왕대밭으로 가려진 뒤란에 가마솥을 걸으시고 설 명절과 추석명절날만큼은 꼭 술을 빚으셨다.

 

명절이 다가오기 보름 전부터 할머니는 멥쌀인지, 찹쌀인지는 모르지만 한말 남짓 벼를 머리에 이시고 방앗간을 찾아가셔서 제사에 쓸 것이라 말씀하면 양이 적어도 방앗간 소장님은 언제나 별도로 빻아 주셨다.

 

사실 방앗간에서는 한, 두말은 방아 기계를 돌리지 않는다. 하지만 매번 명절에 직접 머리에 이시고 오시는 할머니의 부탁은 당연하게 생각하셨던 거 같다.

 

이렇게 빻아 오신 쌀을 일부는 부엌 별도의 장독에 담아놓으셨고 일부는 이백여 미터가 족히 되는 우물에서 새벽 일찍 물을 길어다가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씻고 씻어 누런 베보자기에 싸서 시루에 안치고 불을 지피셨다.

 


하얀 수증기가 푹푹 올라올 때 아궁이에서 불을 빼내어 옆 아궁이에 넣어 두셨고 쪄진 쌀은 소쿠리에 펼쳐 놓으시고 그늘에서 나무주걱으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질 때까지 식히셨다.

 

쪄진 고두밥에 온기가 있을 때 할머니께서 한 움큼 집어주시면서 먹어보라고 하셨다. 그 밥이 왜 그리 고소하고 달고 쫀득쫀득한지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더 맛이 나는 것은 수증기가 새지 말라고 솟과 시루 사이에 쌀가루 반죽으로 붙여 놓은 시루번이 얼마나 구수하고 맛있는지를 알기에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졸졸졸 따라다니면 할머니는 꼬리가 붙었구나, 하시면서 훠이훠이 손을 내저으시며 웃으시곤 했다.

 

겉에는 바삭하고 안에는 쫄깃한 것이 어떤 감미료가 첨가되지도 않았는데 요즈음 나오는 갖가지 과자가 이보다 더 맛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뚜막에 걸터앉아 할머니가 떼어주시는 뜨거운 시루번을 먹고 있노라면 할머니는 언제나 조상님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

 

 

옛날 몇 대 할아버지는 무슨 벼슬을 하셨고 가까운 증조부님은 진사를 하셨다는 등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는 나름 손자에게 가문의 가풍을 좀 과장해서 알려 주셨던 거 같다. 

 

이렇게 그늘에서 수분이 없도록 식힌 고두밥에 당시에는 엿기름인지, 누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떡 진 밀기울 같은 것을 부숴서 섞어 넣고 자작하게 물을 붓는다.

 

한참을 비비고 비벼 술 항아리에 넣고 새벽에 길어다 놓은 미지근한 샘물을 다시 추가로 가늠하여 넣어놓으셨다.

 

그리고 깨끗이 닦아서 말려놓은 비닐 비료포대로 입구를 봉하고 이불로 칭칭 동여매 아랫목에 놓으시고는 두 손을 합장하시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중얼중얼 말씀하시고는 두세 번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면 집마다 술 신이 있어 술을 잘 익게 만들어 달라고 비는 거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이 말이 맞는다. 집집마다 냄새가 다르고 또 집 구조에 따른, 또 위치에 따라서 혼재(混在)하는 균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래서 할머니는 각 집집마다 술 신이 따로 있고 그 술 신에 따라서 각기 다른 맛을 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불러서 방에 들어가 보면 항아리에 귀를 대보라고 하셨고 소리를 들어보면 정말로 술 신이 왕림하셔서 비가 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 뽀글뽀글 물방울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몇 날을 확인하시고 맛을 보고 술 담근 이후로 할머니는 밖에 출입을 거의 하지 않으시고 지극 정성으로 술을 걸을 때가지 계속 되었다. 몇 날이 지나고 할머니가 분주해지시면 그날이 바로 술을 거르는 날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용수는 가마솥 끓는 물에 몇 번을 헹구어 내시고 신주단지 모시듯 잘 닦아 놓은 윤이 반짝반짝 나는 항아리는 햇볕에 말려 놓으셨다. 

 

비로소 술 안친 항아리는 뒤란 툇마루로 나가게 되고 용수를 술 독 안에 지그시 눌러 놓는다.

 

다음날 할머니는 목이 길쭉한 표주박으로 정성스레 맑은 술을 떠내어 작은 술 항아리에 담으시고 그늘지고 바람이 잘 통하는 툇마루 안쪽에 누가 볼세라 고이 모셔놓았다.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순서다.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서 맑은 술은 받아내고 남은 술지게미를 삼베 자루에 담으시고 두부 할 때 콩물을 짜듯이 꾹꾹 눌러 짜내고 여러 번에 걸쳐 간을 보셨다.

 

아마도 적당한 막걸리 도수를 맛으로 계산하셨던 것 같다.

 

뽀얗게 만들어진 막걸리 한잔을 시원스레 들이키시고, 한참을 가라앉힌 후에 다시 막걸리 윗술은 처음 술을 안치셨던 항아리 담아 맑은 술 옆자리에 가져다 놓으시고 밑에 남은 걸쭉한 술은 다시 앙금을 가라안친 후에 소주 대병에 담아 부엌 부뚜막에 올려놓으셨다.

 

그 다음은 마지막으로 수분이 거의 없이 포슬포슬한 지게미를 당원 물에 버무려 주먹밥 만들 듯이 만들어 주시면서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단단히 이르고는 주먹만 한 지게미 한 개씩을 뭉쳐주시면 동생과 하나씩 받아먹었다.

 

그 달달한 맛과 구수한 향, 그리고 먹고 난 후에 볼이 발그레 해지면서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 졌고 잠이 왔다.

 

아마도 할머니는 지게미를 많이 먹지 말라는 것은 지게미에도 술 성분이 있어서 그러셨다는 것을 안다.

 

사실 나는 할머니 몰래 대나무 광주리에 보자기를 덮어 부엌 선반에 올려놓은 그 지게미를 많이도 훔쳐 먹었다. 

 

이 지게미는 고슬고슬하게 말려 닭 모이로 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아까워 그랬는지 훔쳐 먹어서 더 맛이 있었는지 하여튼 닭에게 주는 게 아까웠다.

 

닭들 역시 이 지게미를 먹고 나면 시들시들 졸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가관이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부터 나는 술에 익숙한 체질로 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부엌에 가져다 놓은 걸쭉한 막걸리는 어느 날 부엌에 들어가 보면 위에 맑은 술과 가라앉은 고운 지게미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그 맑은 술을 다시 걸러 오래되어 주둥이가 깨진 초 항아리에 덧 부어 넣으시고 입구를 무명 헝겊으로 싸매어 부엌 부뚜막 가장자리에 놓으셨다.

 

가끔 냄새를 꿈꿈 맞으시고는 너무 더우면 찬 곳으로 뜨거우면 시원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놓으시면서 초를 익혔다. 

 

 

할머니가 하셨던 막걸리 만들기에서부터 초항아리에 초를 숙성시키기까지 쌀과 누룩과 물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용처에 쓰였다.

 

그 재료들이 맑은 술과 막걸리와 지게미와 그리고 초라는 전혀 새로운 물질로 변했던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우리 식문화에 밀접하게 녹아 있던 전통이 1910년도에서부터 1945년까지 일본 지배 하에서 명맥이 끊어져 있었고 1965년 해방 후 식량 부족을 겪으면서 양곡관리법이 만들어져 더 긴 시간 전통이 단절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식초 문화는 고려시대(지봉유설, 향약구금방)로부터 조선시대에(규합총서, 동의보감)에 이르기까지 식초에 관한 문헌에서 확인 할 수 있고 이를 식 문화 뿐만이 아니고 의약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오랜 역사와 함께 우리 생활 속에 깊게 자리했던 우리의 식초 문화가 근래에 들어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시는 분들이 나타나게 되고 학회나 아카데미를 운영하시면서 전파에 힘쓰고 있다.

 

그간 틈틈이 찾아가서 상담도 해보고 시음도 해보고 그분들이 집필하신 연구노트나 집필한 책도 구해서 읽고 하다 보니 이론에는 어느 정도 해박한 지식은 아니더라도 두루 살펴보기는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몇 가지 의문점을 품게 되었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더 많은 서적이나 인터넷을 뒤졌고 각종 관련 법령이나 심지어는 화학서적과 같은 전문 서적에 까지 구입해 보았다.

 

식초는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만드는 방법이 각기 다르다? 만드는 과정에 있어 정확한 데이터가 있다? 사용하는, 섭취하는 기준이 제도화 되어 있다? 이러한 부분에서 많은 의문점을 갖게 되었다.

 

우선은 국내의 여러 전통식초 전문가의 식초 빚는 방법들을 찾아 종합해 보고 그 환경과 여건에 따른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내가 터전을 마련한 양양에서의 식초 빚는 방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론에 집착을 하는 것은 다양하면서 수많은 방법들을 확인하고 찾아 확실한 이론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레 겁먹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은 아니다.

 

“성공을 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실패를 하면 값진 기반을 마련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기술과 데이터를 축적하고 할머니께서 만드신 부뚜막 식초에 대한 옛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면 내가 만드는 초는 무엇이 달라도 다를 것이다.

 

이렇게 신, 구의 조화를 이루는 방법이 나오기까지 많은 경험을 해야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분명히 실패도 따를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얻어진 소중한 것들이 값진 내 이력으로 남았으면 한다.

 

그러기 위한 첫 번째가 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두 번째가 현장을 경험하고 세 번째가 이를 실행하는 실습에 이르기까지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

 

초향정 백창기 대표

 

▲ 양양 지역특산주 미수곡주     ©TIN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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