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36 - BYC 창업주 한영대 회장

내의류 외길 75년 한우물로 승부… 자체 브랜드 수출이 애국의 길

TIN뉴스 | 기사입력 2021/08/06 [15:35]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BYC(舊 백양) 창업주 

한영대(韓泳大) 회장

1923~ 

 

▲ BYC 창업주 한영대 회장

토종 내의기업 BYC(舊 백양)는 1946년 불모지였던 내의산업에 선발주자로 뛰어들어 내의 만들기 한 우물만 파며 제품의 규격화와 표준화를 이루고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품질 향상을 선도하며 지금까지도 내의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대한민국 내의산업의 산 역사나 다름없는 75년 외길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한 가지 제품을 만드는 것이 기업이 져야 할 가장 중요한 사회적 책임이자 애국이라는 창업주 한영대 회장의 믿음에서 시작했다.

 

한영대 회장은 1923년 전북 정읍에서 5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나 정읍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백부가 운영하던 포목점과 양말공장에서 일하며 기술을 익혔다. 이후 유산으로 받은 소 한 마리를 팔아 자전거포와 미싱 조립상점 등을 시작하면서 사업에 첫 발을 내딛는다.

 

조카의 성실함을 눈여겨보던 백부로부터 양말공장 인수를 제의받은 한영대 회장은 그동안 사업을 하며 모은 재산으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8월 15일 포목점 자리에 수동 양말기 4대와 횡편기 2대, 직원 5명으로 ‘한흥메리야스’를 설립한다. 

 

이때 하루 양말 생산량이 200켤레였는데 기계가 수동이다보니 힘이 많이 들었다. 한영대 회장은 자전거 바퀴를 이용해 회전바퀴를 크게 만들어 인력소모는 줄이고 생산성은 높이는 기지를 발휘한다.

 

설립 2년 후인 1948년 내의 생산에 도전에 나서는데 큰 편물을 짤 기계를 들일 여력이 없어 기존 양말기의 몸통을 크게 개조한 내의 편직기를 개발한다. 아이디어로 만든 편직기가 가동에 성공하면서 하루 40벌 씩의 내의를 생산하게 된다. 

 

▲ 옛 백양 전주공장 터 교동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1950년대 오버록 기계  © TIN뉴스

 

당시 대전에 있는 수동 양말기 제작소에 맡겨 5개월 만에 기계를 제작했는데 맞는 바늘을 구할 수 없어 한영대 회장이 직접 양말기 바늘을 일일이 숫돌에 갈아 끼워 넣어 완성할 수 있었다. 

 

1950년에는 직원이 30명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한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1955년 5월 전주 교동에 부지를 구해 사업장을 옮기면서 자본금 4000만환 규모의 한흥산업㈜으로 법인을 전환하고 이때 국내 최초로 화학섬유 내의 생산에도 성공한다. 

 

▲ 1955년 전주공장 이전식, 전주 한옥마을 내 공장은 교동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 국내 인구는 2천만 명에 달했지만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지나오면서 극심한 물자 부족으로 연간 내의 생산량은 52만매에 그쳤다. 대부분 한복을 입었고 도시 학생과 상류층에서만 메리야스 내의를 입었다. 이후 버선 대신 양말을 신고 속곳과 고쟁이 대신 삼각팬츠와 러닝셔츠를 입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한흥산업㈜도 본격적으로 성장의 길을 걸으며 자리를 잡는다.

 

그 결과 1955년 10월부터 2개월에 걸쳐 서울 창경원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 산업박람회인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면내의를 출품, 국회의장상을 수상하고 1958년에는 정부수립 10주년 기념사업으로 진행한 우량국산품 인기투표에서 부통령 최고득점상을 수상한다.

 

1957년 8월 양 옆머리가 심벌마크인 백양(白羊) 상표를 등록했는데 이후 1985년 BYC로 바뀌기 전까지 30년 동안 국산 내의 브랜드를 대표하며 자리를 지켜왔다. 

 

1958년 당시 대․중․소로만 대충 구별돼 있던 내의 사이즈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민의 가슴둘레 사이즈를 조사해 성인용 제품 사이즈를 4단계(85․90․95․100㎝)로 세분화해 생산했는데 60년대 초 정부에서 그대로 규격화하면서 국내 의류 문화 발전에 기여를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또 국내 최초로 아염소산소다 표백 기술을 도입해 변색이 적고 내구성이 높은 제품을 만드는 데도 성공한다. 이때부터 순백의 이미지를 강조한 브랜드로  소비자들에게 인식되면서 기본 런닝셔츠는 지금도 200만장 넘게 팔릴 정도로 대표 상품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1962년 한흥물산에서 화학섬유로 만든 동내의 브랜드 본넬 신문광고  © TIN뉴스

 

1960년 4월 한흥물산㈜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1979년 2월 기업과 브랜드 이미지 통합을 위해 사명을 ㈜백양으로 변경한다. 1996년에는 국제화 시대에 발맞춘 기업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BYC로 다시 변경했다.

 

한영대 회장은 혁신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외시장 공략에도 일찌감치 나서는 등 브랜드 파워를 기르는데 주력했다. 1963년 미쓰비시상사와 계약해 일본에 진출하고, 1970년 수출 100만 달러를 달성했다. 1976년 국내 메리야스 수출업체로는 처음으로 중동지역에 자기상표(백양표)를 부착, 2만4천달러 어치인 면내의 3천타(打) 수출에 성공하며 메이드인코리아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1966년에는 면25수, 45수 제품이 KS마크를 획득하고, 코마사 40수 내의가 주종을 이루던 1976년에 최고급 면사를 사용해 고가품으로 팔리는 100수 내의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1977년에는 IWS(국제양모사모국)으로부터 울마크 사용권을 획득했으며, 울의 단점을 보완한 방축가공법을 이용, 세탁기로 빨 수 있는 순모내의를 개발했다. 생산성 향상과 품질개선에 노력한 공로로 1982년 제9회 상공의날에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 1980년대 백양 전주공장에서 직원이 백물(흰색 속옷) 봉제 작업을 하고 있다.  

 

1979년 서울 생산라인인 영등포구 제2공장을 전주공장으로 이전 통합하면서 일괄생산공장으로 가동을 시작했다. 1985년 동양 최대 규모의 편직공장을 익산에 가동하고 1986년 서울 구로공단, 1987년 전주에 생산공장을 준공한다. 1990년 메리야스 원자재인 면사의 안정적 확보기반을 위해 신한방을 설립하고 3만4560추 규모의 방적공장을 완주에 완공했다.  

 

브랜드, 이것이야말로 

세계시장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원천

“외국 바이어에게 기댈 게 아니라 

세계의 소비자들에게 직접 다가가자”

 

일찌감치 수출에 힘을 쏟았으나 거의 대부분이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수출돼 제 값을 못 받는 것을 안타까워한 한영대 회장은 세계적인 자기상표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1985년 빨간색 바탕에 흰색으로 ㈜백양의 영문 머리글자인 BYC를 새겨 자기상표를 만든 후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해외시장에 BYC를 알리는데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해외 광고와 판매망 구축에 과감히 투자했고 품질향상에 힘을 쏟아 외국 소비자들의 신뢰를 쌓아나갔다.

 

▲ 1994년 백양 수출 담당 직원들이 바레인 BYC 전문 도소매상들과 상담을 하고 있다. 

 

그 결과 ㈜백양이 1992년 자기상표 BYC로 속옷을 수출한 나라는 아프리카 오지를 비롯해 46개에 이르렀는데 이는 50개국의 인켈에 이어 소비재로는 국내 2위에 해당됐다. 1993년 7천2백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는데 자기상표 수출비중이 지난 1991년 36.1%, 1997년 47.7%를 기록한 뒤 절반을 훌쩍 넘긴 60%에 육박했다.

 

특히 자기상표 전략을 채택한지 4~5년 만인 1980년대 말 3저 호황이 끝나고 한국 섬유업계의 저임 매력이 없어지자 바이어들이 동남아나 중국 등으로 속속 발길을 돌렸다. 섬유업계가 불황에 허덕였지만 해외시장의 소비자들이 BYC를 계속 찾으면서 백양은 굳건히 버틸 수 있었다.   

 

백양은 1989년 매출 순이익 등 모든 면에서 높은 신장률을 기록, 기술개발, 합리경영에는 사양산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보여주었다. 백양이 추구하는 세계인의 BYC는 섬유산업을 놓고 일고 있는 섣부른 사양산업론을 일축하는 동시에 고유상표로 섬유산업의 새지평을 열어가는 귀감으로 평가되고 있다.  

 

▲ 우리나라 내의 수출 1호 기업 BYC는 국가경제 발전에 큰 이바지를 했다. BYC 두바이 매장  © TIN뉴스

 

무엇보다 BYC가 이렇게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오랫동안 백양이 주문자 상표부착(OEM) 생산을 하면서 꾸준히 쌓아온 품질에 대한 신용 때문이었다. 또 임직원들 스스로 창업 이래 내의류 업종에만 전념해오면서 이뤄낸 한길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쳤다는 자부심으로 도전에 나섰다. 이런 전문화가 품질경쟁력을 낳고, 자기상표의 좋은 이미지로 연결되었다.

 

물론 백양도 실제로 한 프랑스 업체의 상표를 기술과 함께 사들여 쓰는 방안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손쉬운 길을 마다하고 순국산 자기상표를 내걸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자기상표를 향한 한영대 회장의 집념이 큰 몫을 했다. “상표도입도 고려해봤으나 소비자와 국가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린 한영대 회장은 그런 면에서 경제에 앞서 국가를 생각하는 기업인이었다. 

 

한영대 회장은 “세계 최고의 회사를 지향하면서 어떻게 남의 브랜드를 붙여 팔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수출이건 내수건 얼굴 있는 상품이여야만 장래가 있다”면서 “자체 브랜드야 말로 우리 상품이 세계시장에 뿌리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세계 제1위의 내의의류 제조업체가 되겠다는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발걸음”이라고 했다.  

 

▲ 1960-80년대 서울의 백양메리야스 직영점  © TIN뉴스

 

㈜백양의 자체 브랜드에 의한 수출 전략은 1990년 이후 경제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 1990년에는 대신경제연구소가 선정한 최우수 상장기업 금상을 수상했으며, 1991년에는 한국능률협회로부터 최우수중견기업상을 받았다.

 

한영대 회장은 “기업가는 돈벌이를 찾아 나서기보다는 한 업종에 전념, 보다 양질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 곧 애국의 길”이라는 경영철학을 실천해왔다. 20대에 뛰어들어 상수(上壽)를 바라보는 지금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품질만큼은 최고라야 한다”는 품질제일주의 경영철학으로 속옷 만들기에 한평생을 바쳐왔다. 

 

하지만 내의류산업 한길만을 걸어왔기에 때로 주변에서 어리석다는 얘기도 들었다.

 

특히 20년 늦게 내의 업계에 뛰어들어 1993년 당시 골프장, 스키장, 프로야구단 등 22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50대 재벌로 성장한 쌍방울그룹과 비교될 때도 “이 일, 저 일 다 하면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지 못한다. 처음부터 큰 돈 벌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천직으로 한번 붙든 일이니 세계에서 제일가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했다.  

 

 

특히 한영대 회장은 “좋은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질 좋은 제품을 값싸게 제공해 국민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기업의 의무”를 철칙으로 삼아 유니클로의 히트텍이 나오기 훨씬 전인 2001년 일본에서 수입한 원사로 국내 최초의 발열내의를 내놓기도 했다.

 

한편, 기업의 이윤을 환원시키는 것이야 말로 기업가 정신이자 애국으로 생각하는 한영대 회장에게 외길 내의산업이 업적이라면 사학 양성은 숙원 그 자체였다. 

 

1984년 산업체 부설학교인 정명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1985년 학교법인 한영학원(현 신한학원) 초대이사장으로 취임, 신한중학교와 신한고등학교를 명문사학으로 바꿔 놓으면서 2013년 국민교육발전유공자로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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