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세계 최고 면방기업 꿈꾸다

충남방적 창업주 청운(靑雲) 이종성(李鍾聲)

TIN뉴스 | 기사입력 2021/07/19 [13:16]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충남방적 창업주

청운(靑雲) 이종성(李鍾聲)

1924~1995

 

▲ 충남방적 창업주 이종성     ©TIN뉴스

동아그룹·한화그룹과 더불어 충남을 대표하는 기업 충남방적그룹(현 SG충방)은 창업주 이종성이 1970년 5월 충남 천안에 있는 면방적기 3만추의 국안방적을 인수하면서 시작된다.

 

이종성은 1924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태어나 공무원이었던 선친을 따라 조치원을 거쳐 대전으로 이사한 후 5년제 대전중학교(현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44년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로스쿨)를 졸업한 후 당시 전쟁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내려진 일본의 징병령으로 군대에 끌려가 해방을 맞는다.

 

해방 이후 대전지방검찰청 입회서기로 공직생활에 투신하면서 법무부차관 비서관, 대전지검 회계과장, 법무부 경리·총무과장, 해무청 총무·어정과장,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총무·토목행정과장 등으로 근무했다.

 

4.19로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토목행정과장에서 해임된 이종성은 “의식주와 관련된 사업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평소 신조에 따라 지하실에서 허름한 기계로 포테이토칩 생산공장을 운영하지만 수금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업을 접는다.

 

2년여 휴식을 마친 후 1962년 다시 내각수반 비서실장으로 반년 남짓 공직생활을 이어가지만 수반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서 자동으로 면직되어 16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때 부친 이기세(李埼世)가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국회의원 선거의 참모를 맡는데 이기세는 충남도지사 등 네 번의 도지사를 역임한 정치가이자 기업가(충남방적 회장)로 34년을 대쪽과 같은 청렴한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아들 이종성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후일 이종성은 충남방적이 궤도에 오르자 정계에 진출해 부친이 이루지 못했던 국회의원(충남 홍성·예산·청양 1981년 제11대)의 배지를 달아보고 이후 수년 동안 의정생활을 경험하지만 정치를 스스로와는 연이 없는 일로 치부했다.

 

당시 국회의원이 되면 기업을 하면서 느꼈던 많은 부조리한 행정이나 정책을 개혁하고 솔직히 기업 운영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업인이라는 본업 때문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1965년 7월 고모부 민덕기가 은행관리로 있던 조선맥주(크라운맥주, 현 하이트진로)를 인수하면서 이종성에게 상무자리를 제의하자 이를 수용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다.

 

이종성은 모험적인 경영전략으로 당시 시장을 주도한 OB와의 출고량 격차를 줄이는 등 경영개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인수당시 돈줄을 쥔 동업자가 2년 만에 조선맥주를 매각하면서 고모부와 함께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때 이종성은 사업에 있어 자금(금융관계)과 조직력의 중요성, 동업의 어려움에 대해 깨닫게 된다.

 

6개월 후 고모부가 은행관리에 있던 국안방적을 인수하겠다며 같이 일할 것을 다시 제안했지만 이종성은 오히려 인수를 말렸다. 이종성이 본 고모부는 현장 경영자보다는 명예욕이 더 큰 분이었기에 전 재산을 담보로 한 인수는 위험부담이 커보였다. 무엇보다 이종성이나 고모부나 방적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결국 고모부의 뜻을 꺾지 못하고 1967년 11월 이종성은 국안방적 전무로 취임한다. 앞선 조선맥주처럼 이종성이 본 은행관리업체의 운영 실태는 한심 그 자체였다. 사무적인 체계도 전혀 서있지 않고 공장설비가 노후화되고 생산라인 가동도 비능률적이다 보니 종업원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종성은 서울과 천안공장을 수시로 오가며 종업원을 독려하고 시설을 보수하고 재건하는데 주력했다. 이때 기존의 1만추 기계도 낡아서 실을 제대로 뽑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모부가 2만추의 낡은 기계를 인수한다고 하자 이종성이 반대에 나섰는데 이번에도 고모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3만추 규모의 시설이 갖춰졌지만 속빈 강정에 불과했다.

 

▲ 국안방적 천안공장 초창기 <사진출처 : 이종성 대표의 자서전 ‘나의 이력서’ 中> © TIN뉴스

 

무엇보다 새로 인수한 2만추는 오히려 기존 것보다 더 형편없이 노후 된 것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원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다보니 미국 원면업자에게 속아 원면까지 낙면을 사게 된다. 돈은 들어 갈대로 다 들어갔지만 실상 제대로 나오는 결과물이 별로 없었다.

 

가까스로 정부의 불실기업 정리대상 업체에서도 제외됐지만 운영을 계속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후기계를 수리라도 해야 현상유지가 가능하겠지만 막대한 자금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이종성은 고모부의 만류에도 전무직을 스스로 사임한다.

 

국안방적을 인수한지 3년째 되던 해 더 이상의 회생 기미가 보이지 않자 관리은행이었던 조흥은행이 국안방적은 물론 담보물까지 매각하려고 나섰다. 다급해진 고모부가 이종성에게 국안방적 인수를 제안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종성은 고모부의 딱한 상황을 차마 못 본 척 할 수 없어 독자 경영을 조건으로 16년 공직생활로 얻은 4층 건물을 담보로 인수를 결심하고 1970년 5월 21일 국안방적에서 충남방적으로 상호를 변경한다.

 

그런 점에서 이종성 스스로 지금 재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기업가들이 말하는 사업보국의 정신 같은 스스로 목표나 계획을 세워 창업을 했다기보다 고모부의 사업을 보좌하다 불가피하게 창업에 뛰어들었다고 말한다.

 

이종성은 인수 후 공장 재건을 위해 직원들에게 급여인상, 처우개선 등을 약속하고 마침 한국 진출을 꾀하던 일본 미쯔이 상사에게 낡은 기계를 수리하는 조건으로 면사 공급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기계 수리를 완료하면서 일본 미쯔이 상사에 3천불 상당의 면사를 수출하는데 성공한다. 종업원들도 대우가 개선되고 수출이 시작됐다는 소식에 신바람을 내기 시작했다.

 

제조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이종성은 누구보다 현장중심의 경영을 중시했다. 현장을 모르고 판매관리나 기획, 영업이 이뤄질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중역들은 의무적으로 주 1회 정도 현장에 내려가야 했다. 이종성도 천안공장이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랐지만 일주일에 이틀은 내려가 기술자들과 침식을 같이하는 현장 경영을 실시했다.

 

▲ <사진 좌> 천안공장에서 종업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이종성 충남방적 대표 <사진 우> 1979년 3월 9일 충남방적 대전공장에서 이종성 대표와 배상욱 상공부 차관의 시찰 <사진출처 : 나의 이력서> © TIN뉴스

 

1972년 한동안 주춤거리던 면방경기가 차츰 살아났는데 천안공장에 1만추의 방적설비를 증설하면서 양질의 면사가 쏟아져 나오자 수요가 빗발쳐 없어 못 파는 지경이 되었다. 이때 당시 정부시책인 새마을공장 장려에 힘입어 충남직물(새마을공장)을 설립하고 밑거름 삼아 직포사업도 확장한다.

 

또 방직업계의 호황으로 천안공장 시설을 10만추까지 확장하고 새 기계 도입을 위해 일본을 여러 차례 다녀왔는데 이때마다 이종성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름대로 면방업에 대한 앞으로의 비전에 확신을 갖게 된다.

 

당시 합동방적 인수를 추진하던 중이었는데 일본의 한 백화점에서 코마사로 만든 제품을 본 이종성은 전화를 걸어 인수 취소를 지시하고 그 자금을 코마사 기계 도입에 쓰도록 했다. 또 천안공장이 주변 여건이나 규모로 한계에 도달하자 1976년 고향 예산에 4만평의 방적공장을 완공한다.

 

▲ 충남방적 천안공장(사진 좌측)과 예산공장(사진 우측) 전경 <사진출처 : 나의 이력서> © TIN뉴스

 

천안과 예산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될 즈음 이종성은 면방업계나 주변인들로부터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고 독자적인 생각과 고집으로 일을 처리해 ‘고집쟁이’ ‘비협조적인 인물’로 자주 비춰졌다.

 

당시 정부에서는 성수기 때 수요업체들이 면사 구매에 애를 많이 먹으니까 면방업체들이 소요량을 방적 추수별로 할당하여 이를 의무적으로 실수요업체에 공급하라는 ‘면사배급제도’를 실시했다.

 

문제는 제도를 악용해 수요업계에서 성수기에만 이 할당 면사를 싼 값에 구입하려고 했고 일부 업체들은 할당 면사를 사서 제품 생산에 투입하지 않고 비싼 가격에 시장에 내다 파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종성은 “내가 잘못해 회사가 망하면 나 혼자만이 아니라 이 근로자들이 모두 직장을 잃게 된다”며 오직 회사와 종업원들의 앞날만을 생각했다. 또 그것이 나아가 나라 경제를 위한 일이라고 느꼈기에 ‘면사배급제도’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또 오랫동안 사업을 하면서 시설재 원리금을 대부분 다 상환해 뒤늦게 시작한 충남방적보다 여러 면에서 조건이 유리한 기존 면방업체들과는 그런 점에서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부 메리야스 시설과 직기 6백대로 시작한 예산공장은 나중에 방적 15만추 규모까지 증설이 이뤄져 천안공장과 함께 충남방적의 주력 공장으로 성장했다. 두 공장 시설을 합하면 모두 25만추에 달해 당시 대농과 버금가는 규모였다.

 

1976년 의욕적으로 인수한 대성모방이 운영에 실패하면서 난관에 빠졌지만 예산공장 가동과 함께 경기가 살아나면서 수출이 활기를 띄웠다. 이것이 뒷받침되어 1977년 12월 22일 100억불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8천5백만 달러어치를 수출해 금탑산업훈장을 타는 영광까지 누리게 된다.

 

▲ 1974년 수출의 날에서 이종성 대표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고 있다. © TIN뉴스 

 

면방업에 뛰어들면서 이종성의 목표는 국내 제1의 면방공장이 아닌 세계 정상의 면방공장을 건설하는데 두었다. 천안·예산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이종성은 그동안 꿈꾸어왔던 꿈을 실현시키는 도전에 나선다.

 

마땅한 공장부지 물색에 난항을 겪던 중 오랜 기간 상사로 모셨던 홍진기 전 법무부·내무부장관(당시 중앙일보 사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장인)으로부터 공장설립이 백지화된 제일합섬의 면방공장용 부지를 소개받게 된다.

 

허허벌판의 황무지였지만 한 눈에 명당임을 알아챈 이종성은 충남 대덕군(현 대전시)에 27만평의 대지를 매입하고 외자 7천만 달러와 내자 2백억원을 투입해 정방기 26만추, 직기 2천7백대의 대규모 제3 면방공장과 염색 가공시설 건설을 위한 대전공장 건설본부를 발족시킨다.

 

본부장에는 유주형 전무를 임명하고, 공장 건축에 따른 기술담당은 김해곤 이사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이종성 또한 일주일에 3일 정도는 현장에서 지내다시피하며 건설 관계자들을 독려했다.

 

특히 주무부서 현직 각료의 입에서 섬유산업 사양론이 공식적으로 거론된 상황에서 당시 그 정도 투자금액이면 남들처럼 화려하고도 방대한 중공업 프로젝트 하나 정도는 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래서 주변에서도 새로운 사업에 대한 권고가 많았지만 이종성은 충남방적과 함께 외로운 면방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반면 국내 면방업계에서는 정부가 국내 면방시설을 3백만추까지 확보해야 된다는 판단아래 공고했던 증설 허가분을 경기 불투명을 이유로 모조리 반납했다. 이때 충남방적은 오히려 반납분을 모아 처음 목표였던 10만추의 3배인 30만추 가까운 증설 허가를 받는데 성공한다.

 

당시 출혈 판매를 강요했던 내수 배급제 등으로 인해 국내 면방업계의 체질은 형편없이 약화되고 부실화되었다. 한편에선 다투어 중화학공업에의 진출로 한국 경제성장에 원동력이 되고자 하는 풍토가 섬유산업을 망각의 그늘 속에 묻히게 했다. 그런 이유로 같은 면방업계에서도 충남방적의 시설확장을 무모한 도전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 1983년 예산공장 기숙사 새마을 개점식 후 시찰하는 이종성 대표와 부친 이기세 명예회장  © TIN뉴스

 

그럼에도 이종성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대전공장은 일본 사람들마저도 섬유일관 플랜트로서는 사상 최대 규모라고 혀를 찰 정도였다. 그만큼 이종성에게는 반드시 우리나라 면방산업이 면방업의 선두주자인 일본을 누르고 경쟁상대인 대만, 중국 등을 제치고 세계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1978년 2월 방적기가 들어설 건물 16동 중 12동이 완공되고 4월에는 일본에서 4만추 규모의 방적시설이 들어서면서 가동을 시작했다. 다행히 천안, 예산과 마찬가지로 대전공장을 건설하면서부터 한동안 침체를 보였던 면방 경기가 되살아나면서 실이 딸리자 그야말로 만드는 즉시 팔려 돈이 됐다.

 

이와 같은 수출 호조로 한창 대전공장 건설공사가 마무리되던 1977년 12월 충남방적은 섬유, 그것도 면제품 단일 품목으로 대망의 1억불 수출 고지를 넘어서면서 국내 기업 가운데 수출 랭킹 17위를 차지한다.

 

1979년 3월 충남방적의 심장부가 될 대전공장이 완공되면서 면정방시설 24만추에 2천4백대가 설치됐으며, 얼마 후에는 대규모 염색가공시설도 완공했다. 특히 공장 설립 당시 불황으로 인해 판매에 거의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의 방적기계 메이커들을 경쟁시켜 값을 하향 조절했는데 국내 면방업체들이 구입해왔던 가격의 거의 절반 수준에서 구매할 수 있었다.

 

▲ 충남방적 대전공장 전경 <사진출처 : 나의 이력서> © TIN뉴스

 

누구도 겁을 내서 생각지도 못했던 방대한 시설이 완공되면서 충남방적은 그해 12월 대전공장의 본격적인 가동으로 1년 만에 배 이상의 신장을 보이면서 2억불 수출의 탑을 받아내는 쾌거를 이뤄낸다.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나 노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신념을 가졌던 면방업계의 거인 이종성은 1970년 직기라고는 한 대도 없고 낡은 면정방기 3만여추에 수출실적은 단 1달러도 없던 조그만 부실면방회사를 인수한지 불과 8년 만에 면정방시설 52만추, 직기 4천4백대를 보유한 국내 최대의 면방업체로 성장시켰다.

 

또 충남방적은 산하에 7, 8개 계열 기업을 거느리는 모기업이 됐는데 이러한 성과에 대해 이종성은 우연의 결과가 아닌 1만2천여 종업원의 피땀 어린 노력과 정성의 소산이라며 현장 우선주의와 봉급격차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자신의 경영철학이 실증된 결과물이라고 강조했다.

 

인수 당시 회사의 문이 닫혀있던 비참했던 시간 속에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을 겪지 않겠다는 종업원의 뜨거운 결의와 회사가 문을 닫는다면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단호한 자각이 회사를 인수한지 불과 10년도 안 돼 국내 12개 방적회사 중 최하위이던 회사를 22개 방적회사 중 최정상의 길을 걷게 한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실제 충남방적이 노사간의 일체감을 중시해 1980년 국내최초로 노조지부장을 비상임감사로 선임, 경영에 참여시킨 것도 ‘생산직사원우선’이라는 이종성의 경영철학에 근거한 것이다. 또 충남방적은 고졸자로서 반장·조장 등 공장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3백여명에게 일급제가 아닌 사원제를 적용했다.

 

한편, 평소 배움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항상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지론으로 삼았던 이종성은 만약 현재의 사업이 아닌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면 틀림없이 후세들을 가르치는 교사직을 택하였다고 한다. 실제 고향 후학인재양성에도 힘썼으며,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근로자들의 ‘배움의 길’을 강조했다.

 

▲ <사진 좌> 예덕여자중고등학교 <사진 우> 충일여자중고등학교  © TIN뉴스

 

1973년 국내 최초로 공장부설 학교인 천안 청운여고를 설립, 전액무상으로 생산직 근로자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이후 예산 예덕실업고등학교, 대전 충일여중고, 오산 수영여고 등을 설립해 7천여명의 생산직 근로자들이 배우며 일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77년 2월 설립된 청운장학회에서는 매년 280여명에게 3천여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1983년 혜전전문대학(현 혜전대학교)을 설립하고 1982년부터는 6년간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학교 총 동창회 부회장을 지내고 1984년 제19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총동창회회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낙산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이종성은 1994년 홍성에 충남산업대학(현 청운대학교)을 설립해 육영사업을 추진하던 1995년 12월 17일 타계했는데 당시 충남방적그룹은 주력회사인 충남방적과 온양그랜드파크 운영회사인 ㈜충방, 자동차 부품업체인 대한이연, 화물운송회사인 수도운수 등 모두 3개 계열사를 두고 그룹 전체 매출액도 2천5백억원에 달했다.

 

이종성은 1981년 정계에 진출하면서 경영권을 세 아들에게 넘겨주어 타계직전에는 고문역할만 해왔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1984년에는 6선 국회의원인 정석모 전 내무부 장관의 차남 정진석 현 국민의힘 국회의원(충남 공주시·부여군·청양군)이 이종성의 막내사위가 된다.

 

산업계에 기여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1973년 석탑산업훈장, 1974년 동탑산업훈장, 1975년 은탑산업훈장, 1977년 금탑산업훈장 등을 받았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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