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25 - 동국무역 창업주 백욱기(白煜基)

“인류가 존재하는 한 섬유산업은 영원하다”

TIN뉴스 | 기사입력 2020/11/17 [13:12]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동국무역 창업주

헌암(憲岩) 백욱기(白煜基)

1919~2003

 

▲ 동국무역 창업주 백욱기© TIN뉴스

동국무역 창업주 백욱기는 섬유를 천직으로 삼아 포목상에서 국내 최대 직물그룹을 일궈내며 섬유산업 사양론을 일축시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대표 기업인이다.

 

그는 1919년 경북 달성에서 백남도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대구고등학원을 수료한 후 염료행상으로 경북일대를 떠돌며 장사를 배운다. 16세가 되던 해 서문시장 인근에 포목점 ‘백윤기상회’(윤기는 아명)를 열어 비단직물을 팔며 섬유산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때 포목을 팔면서 신용위주의 거래를 하며 성실하고 검소한 생활태도를 갖게 된 것이 훗날 직물제조업에 뛰어들어 동국무역을 일궈낸 밑거름이 된다.

 

40년에는 군용으로 징발해가던 광목을 팔은 죄로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한다. 2년 뒤에는 일제가 전쟁물자 생산을 위해 기업정비령을 발표하자 점포를 정리한 돈으로 과수원을 사서 광복이 되던 45년까지 책을 읽으며 소일하는 은둔생활을 이어간다.

 

해방직후인 48년에는 대구 인근에 목제직기 20대와 근로자 20명으로 ‘평화직물공장’을 설립, 직물제조업에 뛰어든다. 당시 기계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쇠로 만든 기어에 프레임은 나무로 된 목제직기를 돌려 누에고치를 사와 뽑은 명주실로 인조양단을 만들어 팔았는데 반응이 좋아 기업규모도 커지게 되자 포목도매까지 겸하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로 공장 문을 닫은 그는 휴전협정이 체결된 53년 서문시장에서 ‘평화상회’란 점포를 내고 포목상을 다시 시작한다. 전쟁이후 직물이 귀하던 때라 포목상을 재개한지 1년 만에 자본을 모으면서 북구 노원동에서 낡은 직기 40대로 동국직물의 전신인 ‘아주직물’을 설립해 섬유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동국무역그룹의 발판을 마련한다.

 

▲ 전국 3대 시장으로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구 서문시장 1950년대 모습  © TIN뉴스

  

이때 만든 양단은 전후 호경기를 타고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는데 당시 대구지역은 전쟁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어 대구경북지역 포목상들이 대거 직물생산에 참여했다. 여기에 54년 민의회가 직물세를 폐지하며 제직업자들의 세금부담을 크게 경감시키자 대구지역 섬유경기는 활활 타올랐고 서문시장 역시 전국에서 몰려든 도매상으로 유례없는 대호황을 누리게 된다.

 

당시 포목상들이 앞다퉈 직물생산에 참여했는데 직기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워 서울, 대전 등지에서 헌 기계라도 구입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전후 특수경기로 호황을 누리게 되자 아주직물의 생산설비 확충을 위해 62년 당시 최신식 직기인 이태리제 나셀자수기 2대를 들여와 고급직물을 생산했다.

 

수출에 대한 집념으로 일찍부터 섬유무역에 눈을 뜬 그는 정부의 수출진흥정책에 적극 호응, 65년 서울에 동국무역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직물수출에 나선다.

 

5년 후인 70년에는 비산염색공단에 동국화섬까지 설립해 염색 가공업에 진출하고, 72년에는 반야월에 직물공장, 73년에는 자수전문업체인 우일산업, 성서협업단지 조성 등과 함께 면방업체인 동국방직을 설립한다.

 

82년에는 일 30톤의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생산하는 동국합섬을 설립하면서 원사에서 제직, 직물 및 가공까지 섬유사업 계열화를 실현시키며 동국무역을 일괄 생산체제를 갖춘 종합 섬유회사로 키워낸다.

 

동국무역은 60년대 후반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맞물려 66년에 13만9천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린 데 이어 70년에는 2백10만 달러, 74년에 2천만 달러를 수출해 4년마다 10배 이상을 경신하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폴리에스테르 및 스판덱스 수출회사로 성장한다.

 

▲ 1995년 4월 20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섬유직물수출 1백억 달러 돌파 기념식에서 백욱기 동국무역 회장이 박재윤 통상산업부장관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고 있다.  © TIN뉴스

   

특히 우리나라 직물수출의 40%를 차지하며 78년 1억 달러 수출을 넘어서면서 섬유업계 뿐만 아니라 재계의 주목도 받는다. 81년에는 수출실적 3억1천만 달러를 달성, 국내업체 중 수출순위 10위업체로 부상한다.

 

91년에는 70년에 비해 무려 223배에 달하는 4억7천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이뤄내며 이후 세계 1위의 폴리에스테르 생산업체(연 수출액 7억 달러 돌파)로 대구를 세계적인 섬유도시로 만든 대표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92년에는 섬유직물 단일업체로는 처음으로 수출 5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때 물량인 원단 3억2천만 야드는 남산만한 크기의 엄청난 물량으로 지구를 7바퀴 반을 돌 수 있고, 1인당 4야드를 기준으로 할 때 8천만 명이 옷 한 벌씩을 해 입을 수 있는 양이다.

 

하지만 90년대 초반 이후 섬유수출 호황기가 지나고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등 섬유 후발국들의 추격이 거세지면서 동국무역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90년대 후반 원사가격이 폭락하고 직물수출이 부진한 데다 대량생산체제가 한계에 부딪치면서 원사와 직물수출만으로는 덩치가 커진 그룹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한때 국내 30대 재벌그룹으로 부상하기도 한 동국무역은 세계 경제위기와 직물산업 침체를 겪는 과정에서 무리한 사업 확장에 따른 유동성 부족으로 98년 워크아웃을 신청하게 된다.

 

99년 기업개선작업 약정을 체결하고 계열사인 동국합섬㈜와 동국방직㈜, 12월에 동국화섬공업㈜을 흡수 합병하는 등 섬유종합기업으로 재출범하였으나, 완전자본잠식으로 2002년 4월 상장이 폐지됐다.

 

절치부심 기업회생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국그룹은 해체됐고 2008년 경남모직을 주축으로 한 ‘삼라그룹 컨소시엄’에 매각되면서 원사업체인 동국합섬만 TK케미칼이란 이름으로 재출발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욱기는 동국무역그룹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96년부터 2002년 8월초 간암으로 투병하기 직전까지 옛 동국직물 사무실로 출근하며 정신적 지주로서 동국무역의 부활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2003년 2월 12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섬유산업 천직 삼으며 사양론 일축시킨 대구 경제계 ‘대부’ 

 

6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지며 포항에 일관제철소 건설이 시작되자 대구지역도 주력산업을 섬유에서 기계산업으로 전환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때 섬유산업 사양론도 발생했다. 그러면서 당시 발 빠른 기업들이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편승해 업종을 전환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지역 경제계의 상징적인 인물로 대구 섬유산업의 한 획을 그은 백욱기는 이처럼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으로 몰릴 때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섬유산업은 영원하다”며 주변 섬유업계 관계자들을 늘 격려하는 등 섬유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 1995년 4월 20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섬유직물수출 1백억 달러 돌파 기념식에서 오른쪽부터 박용학 대농그룹 명예회장, 박재윤 통산부장관, 백욱기 동국무역 회장,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 박창호 섬유직물수출조합 이사장 겸 갑을그룹 회장, 김각중 경방 회장, 박용도 무역진흥공사사장  © TIN뉴스

  

69년 대구상의 주최로 열린 중화학산업육성을 위한 공청회에서 섬유산업 육성론을 다시 주장해 참가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가 평생 지녔던 섬유산업에 대한 신념을 엿볼 수 있었다.

 

73년 오일쇼크로 나라 경제가 휘청거릴 때 자수직물업체를 중심으로 한 섬유수출은 중동 바이어들이 오일달러를 들고 사러 몰려올 정도로 호황을 맞게 된다. 당시 업자들 사이에는 걸레까지도 판다는 말이 농담처럼 유포될 정도였는데 이때도 섬유산업 사양론을 일축하는 데 가장 앞장섰다.

 

2,900명의 종업원, 매출 8,155억 원을 기록하는 대기업의 창업주이면서도 그는 늘 칼국수를 즐겨먹는 소박함, 그리고 실사구시를 중시한 성정과 등소평을 닮은 외모로 생전에 섬유인들에게는 ‘대구의 등소평’이라 불렸다.

 

단신이지만 추진력이 강해 지역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팔을 걷어붙였기 때문인데 한 예로 80년대 초 직물업체들이 자금난으로 허덕일 때 금융기관들이 지원을 외면하자 대구은행장을 설득해 2백억 원의 지원금을 받아 지역업체들의 숨통을 터준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또한 어려운 중소업체 사장들이 3개월짜리 어음을 갖고 가면 이자도 받지 않고 현금으로 바꿔줄 만큼 정도 많았다. 특히 경기가 어려울 때도 동국무역 자체 공장보다 400여개 하청업체들의 가동률을 먼저 생각하여 결제를 미루지 않아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대구 섬유산업이 발전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대구섬유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백욱기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사옥을 짓자는 사원들의 건의에 “그 돈으로 공장을 몇 개나 더 지을지 검토해보라”고 지시할 정도로 섬유제조업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단체장을 만류하고 그늘에서 희생하며 업계를 지원했으며, 동국무역에서 배출된 많은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업체를 운영하며 업계를 주도하는 등 국내 섬유산업의 메카인 대구에서 ‘대부’로 불릴 만큼 그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대구섬유산업 발전의 공로자로 꼽힌다.

 

특히 서울지역 업계와 경제단체, 국회를 찾아다니며 홀로 동분서주하는 등 대구·경북섬유산업연합회와 한국섬유개발연구원 같은 섬유관련 기관 및 단체를 설립하고 위상을 제대로 세우는데도 가장 큰 역할을 했다.

 

▲ 1992년 동국무역의 백욱기 회장이 근로자들의 복지후생 차원에서 구미에 150병상 rbahdml 헌암의료재단을 설립, 중앙병원 기공식을 가졌다.  © TIN뉴스


이외에도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79년에는 소년․소녀가장과 대학생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만들었으며, 동국실업고를 설립해 불우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90년에는 헌암의료재단을 설립해서 구미중앙병원을 통해 공단 근로자와 가족들의 의료지원 사업 활동을 펴는 등 지역사회발전에 이바지했다.

 

60∼80년대 수출을 이끌며 섬유 외길 인생을 걸어온 백욱기는 대구·경북섬유산업연합회 회장, 대구상공회의소 부회장, 대구섬유기술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하며 대구 경제계에서 주요 역할을 하였다. 84년 국민훈장 석류장, 89년 국무총리표창, 92년 5억불 수출의 탑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특히 95년 4월 우리나라 섬유직물류 수출이 63년 470만 달러의 소규모 수출을 한지 31년 만에 100억 달러 돌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섬유직물수출조합(이사장 박창호) 주관으로 롯데호텔에서 축하회가 열리는데 이 자리에서 백욱기는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한다.

 

당시 우리나라 섬유직물류 수출규모는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3위였으며 합섬직물만으로는 세계 1위의 수출실적이었다. 이는 94년 전체의 수출규모의 12%, 섬유 총 수출의 65%에 해당됐다. 또 우리나라 전체 무역수지 적자가 63억 달러를 기록한데 비해 섬유류는 120억 달러의 흑자를 올렸고 이 가운데 67억 달러를 섬유직물업계가 벌어들였다.

 

94년에 국내에서 수출한 섬유직물의 물량은 길이로 환산하면 968.1㎞로 이것은 경부고속도를 1만 번 이상 왕복할 수 있는 길이이며 넓이로 환산하면 남북한을 모두 합친 전국토를 53겹이나 덮을 수 있고 부피로는 63빌딩 14개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평생 섬유외길을 달려온 백욱기는 “내가 지금까지 섬유산업의 사양론을 거부하며 초지일관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었고 직물 단일품목으로 동국무역이 5억 달러의 수출실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섬유업을 천직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며 천직론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16세 때 행상으로 사회에 첫 받을 내디딘 그는 “직원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즐겁다”며 “자신이 맡은 일을 천직으로 여길 때 예술가들이 창작하는 것과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당시 동국무역이 갖고 있는 재고 중에는 10년이 넘은 것도 적잖은데 이는 그가 주장하는 천직론과도 연결된다. 그는 “밤잠 못자고 만든 물건을 밑지고 팔수도 없을뿐더러 손해를 보면서까지 내놓을 경우 결국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중소업체의 피해만 커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적성에 맞지 않을 때 변신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일을 자신의 능력과 주어진 조건으로 어떻게든지 융화시켜 소화해내는 사람이 있다”며 “지금 우리 실정으로는 무엇이든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갖고 도전하고 성취해내는 그런 인재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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