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22 - ㈜한영나염 박종근(朴宗根)

“필요한 제품은 반드시 우리 손으로”

TIN뉴스 | 기사입력 2020/10/05 [10:17]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한영나염 창업주 

박종근(朴宗根)

(1936~2018)

 

체계적인 디지털 날염 시스템 구축… 100억 원 사재로 장학재단 설립

배운 기술 안주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화’ 특유의 기업 생존방식 구축

 

 ㈜한영나염 창업주 박종근

㈜한영나염 창업주 박종근 회장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 12월 일본 규슈의 오이타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해방과 더불어 부친의 고향인 경남 울산으로 돌아온 그는 열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장을 찾아 다니며 철물을 팔았다. 

 

그는 차남이었지만 형의 학업을 위해 장남 역할을 대신 맡아야 했다. 또래보다 몸이 컸던 그는 13세 때 부산의 미군 포병부대에서 포탄 나르는 일을 했는데 중간에 허리를 다치면서 귀향해야 했다. 이후 1년 만에 다시 부산의 문현동에 ‘삼미문염’이라는 날염공장에서 일을 시작한다. 

 

조색기능공으로 날염과 처음 인연을 맺은 그는 호료(糊料), 즉 풀을 끓인 후 염료와 섞어 색호(色糊)를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찍는 기술자들이 출근해서 바로 작업할 수 있도록 미리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가장 먼저 현장에 나가야 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석유램프로 밥을 지어 새우젓 하나로 끼니를 때웠고 바로 현장에 나가 솥에서 끓고 있는 풀을 대략 6시간 동안 쉬지 않고 저었다. 독한 약 때문에 손이 트는 등 온전치 못한 몸에도 고통을 마다하고 일을 했다. 그에게 포탄이나 연탄을 나르는 일은 그저 노동에 불과했지만 날염은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실낱같지만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섬유산업에 투신하게 됐는데 당시 섬유산업은 남한 땅에 있어 가장 근대화된 산업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다양한 원자재와 싼 노동력 덕으로 일본의 많은 섬유회사들이 국내에서 공장을 운영했다. 나이와 학력에 상관없이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상당한 기술을 축척할 수 있는 기회였다.

 

색호 만드는 일이 손에 익자 회사에서는 그에게 색을 배합하는 일을 시켰다. 배합은 일도 덜 힘들었지만 재미가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한문, 중학교과서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으며, 책이 없으면 공장의 일을 되새기며 공정이나 날염 방법에 대해 쉬지 않고 공부해 기술을 익혔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부산에서 솜씨 좋은 조색기술자(배합사)로 소문이 났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부산 서면의 큰 날염회사에 스카우트되어 10배 가까운 임금을 받게 되는데 회사 규모도 크다보니 일도 더 빨리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학교 공부는 짧았지만 그는 공장의 모든 것을 자신의 뼈와 피로 생각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자 어느새 인사관리부터 창고관리, 급료관리 등 모든 일을 총괄하는 실력까지 갖추게 된다. 

 

20세에 결혼을 하고 몇 년 뒤 서울 화월곡동의 한 날염회사로부터 제의를 받고 자리를 옮긴 그는 일이 끝나면 늘 동대문과 남대문에 들러 패션 트렌드를 읽었다. 어려운 시절이라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다른 디자인의 옷을 발견하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냈다.

 

당시에는 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원조로 연명하던 시절이라 옷은 단순히 추위로부터 몸을 가려주는 일차적인 목적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의식주 중 가장 뒤에 자리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미군에서 가져온 패션잡지의 수많은 디자인이 빼곡히 채워 있었고 어떻게든 화려한 무늬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여전히 백의민족인 상태로 있거나 군청색과 감색 일색의 작업복을 입던 시절이라 화려한 무늬의 옷은 입고 싶어도 쉽게 입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디자인을 하나둘씩 시장에 선보였고 마침내 좋은 반응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한영나염 창업주 박종근 회장과 1984년 동탑산업훈장, 1991년 1천만불 수출의탑  © TIN뉴스

 

특히 같은 색으로 짙고 옅게 두 번 날염해 무늬가 도드라지게 만든 제품은 빠르게 입소문을 타면서 동대문 상인들로부터 주문이 재촉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최저의 비용으로 최고의 멋을 낼 수 있도록 고심 끝에 내놓은 그의 제품들이 하나같이 히트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성공을 거두었지만 곧 손날염과 수십 년 된 낡은 날염기계로는 바깥세상의 패션잡지에서 본 디자인과 물 건너온 옷들의 수려한 무늬를 구현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고 선진 날염에 대한 그의 갈증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22살에 공장장이 된 그에게 동대문 상인들과 염료 회사들 모두 그의 제품을 칭찬하면서 직접 공장을 차릴 것을 권유했다. 당시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으로 좌절하던 그는 다시 자신감을 얻고 1959년 하월곡동의 한영공업사를 인수하고 본격적인 경영인의 길에 들어섰다. 5년 후 1964년에는 한영나염을 공식 설립하며, 반세기 넘는 날염역사의 시작을 알린다. 

 

한영나염도 초기에는 재래식 날염기술에 머물러 있었는데 당시에는 고급기술을 요하는 제품은 수입해서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상황을 타파하고자 사전에 눈여겨보았던 백색날염(마블프린팅) 기술을 배우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을 전수받는다. 이어 곧바로 사재를 털고 정부에 차관을 얻어 마블프린트 기계를 구입하는데 성공한다.

 

이때의 경험은 “필요한 제품은 반드시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그의 창업 이념이 그대로 담겨있는 첫 시도였다. 그가 들여온 백색날염은 제한이 없는 수많은 색상수와 복잡하고 다양한 디자인을 가능하게 했으며 한계가 없는 예술성으로 우리나라 염색업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백색날염 기법을 온전히 한영나염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차례 개량을 시도했고 그 결과 1972년 ‘홀치기 염색물과 같은 외관을 주는 염색분사식 동시 다색 날염법’이라는 발명특허를 획득하게 된다. 

 

이후에도 이 같은 경영방식은 배운 기술에 안주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화’시키겠다는 한영나염 특유의 기업 생존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백색날염으로 자리를 잡자 한영나염은 구로공단으로 공장을 확장하고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 TIN뉴스

 

백색날염으로 자리를 잡자 한영나염은 구로공단에 공장을 하나 더 마련했다. 한영나염이 주식회사로 전환했던 것도 이때였으며, 당시 직원은 150명을 넘어서 200여 명에 육박했다.

 

그는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기술을 얻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유럽과 일본, 미국 등 선진국을 돌며 최신 정보를 수집했으며, 수동 스크린날염을 기계화한 자동 스크린날염을 한영나염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는다. 

 

자동 스크린날염은 신기술로 각광받은 기계날염법으로 정교한 무늬를 낼 수 있으면서도 재료의 낭비가 적어 규모가 작은 기업에 적합했다. 현재에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기술로 당시에는 이탈리아 등 구미를 비롯해 일본과의 기술 차이를 가장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1973년 일본으로 간 그는 동신공업의 오토매틱 플랫 베드 스크린날염기와 로터리 스크린날염기계를 구입했다. 다음 해인 1974년 구로공장에 설치하는 동시에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젊은 직원들을 뽑아 일본으로 보내 연수를 받게 했다. 

 

 ㈜한영나염 창업주 박종근 회장이 2013년 제27회 섬유의 날에 윤상직 산업부 장관으로부터 60년 공로를 인정받아 영예의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고 있다. © TIN뉴스

 

이외에도 그는 1973년 당시 최고의 날염기술인 ‘Discharge Printing’법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타사 제품의 2배인 국내 최고 가격으로 수출하는데도 성공했다.

 

1980년대에는 기존에 수입에만 의존했던 날염기계의 국산화를 위해 화인전자와 함께 망곡을 조정하는 제품을 개발하고 상품화시켰다. 또 1988년에는 국내 최초로 자동화 염료조색장치(C.C.K) 설비를 가동하면서 인력 소모를 줄여 경쟁력 향상에도 이바지했다.

 

1989년에는 우량 중소기업체로 선정되었고, 1990년에는 반월공장을 증축했으며 ‘고주파에 의한 섬유의 가공방법’에 관한 특허(특허 제34537호)를 획득했다.

 

2005년에는 디지털날염 시스템기기를 도입하고 제품단가를 맞추기 위한 핵심기술이라 할 수 있는 디지털날염용 국산잉크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 국내 최초 디지털 날염 국산화에 성공한다. 

 

ONE-STOP 시스템이 적용된 대규모의 DTP 생산라인을 구축했으며, 또 80인치 광폭 디지털날염 장비를 구비해 그동안 국내에서는 디지털날염 적용이 어려웠던 침구 제품의 생산도 가능하게 했다.

 

한영나염의 지난 60여 년 중 가장 어려웠던 점은 바로 인재 확보였다. 특히 날염업의 경우 최신 기술을 습득하고 운영할 수 있는 고급 인력이 반드시 필요해 인재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에 그는 2011년 평생 모은 개인 사재 100억 원을 출연해 ‘재단법인 한영’ 설립하고 인재양성과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영나염 창업주 박종근 회장은 2011년 평생 모은 개인 사재 100억 원을 출연해 ‘재단법인 한영’ 설립하고 인재양성과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 TIN뉴스

 

그는 1950년대 후반 서울의 한 공장에 스카우트되어 올라온 이후 은퇴하기 전까지 밤 12시에 퇴근하고 새벽 4시에 출근하는 습관을 오랫동안 지켰다. 

 

그렇게 출근하여 밤샘 작업이 제대로 이행되었는지 파악하고 오전 8시에는 동대문에 나가 만든 물건이 얼마나 팔렸는지, 또 어떤 디자인이 많이 팔렸는지 확인한 후 공장으로 돌아와 다음 작업 계획을 세웠다.

 

당시에는 공장과 거래처가 소통이 제대로 되어야 잘 팔리는 디자인의 물건을 바로바로 지원해줄 수 있었다. 또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기에 한시라도 방심하면 남들에게 뒤처질 수 있었다.

 

 2011년 ㈜한영나염 창업주 박종근 회장이 본지가 선정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섬유패션인 대상을 수상하고 노희찬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과 장석모 TIN뉴스 발행인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TIN뉴스

 

이러한 열정으로 1980년 수출의 날에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았으며, 1984년에는 동탑산업훈장, 1991년에는 1천만불 수출의탑, 2013년 제27회 섬유의 날에는 60년 공로를 인정받아 영예의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는 쾌거를 이뤄낸다.

 

60여 년 전 날염업계에 입문해 선진날염기술을 최초로 도입하며 대한민국 섬유패션산업에 이바지해온 그는 2018년 12월 14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영면(永眠)에 들어갔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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