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30 - 이화산업 조명주(曺明珠) 조창환(曺昌煥) 부자

국산화 위해 헌신한 ‘염료업계 대부’

TIN뉴스 | 기사입력 2021/02/15 [17:33]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이화산업

조명주(曺明珠) 1907~2006

조창환(曺昌煥) 1937~ 

 

▲ 이화산업 조명주, 조창환 부자  © TIN뉴스

대한민국 공업화의 산파 역할을 해온 섬유산업에서 색을 창조하는 염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염료의 수준에 따라 색상의 질이 달라져 최종제품의 퀄리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염료산업은 섬유화학공업과 연관된 정밀화학 분야이자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첨단산업으로 부가가치가 높아 세계적으로 선진공업국가들에 의해 거의 독점되어오다시피 했다.

 

국내 염료산업은 194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밀화학 분야였기 때문에 일본이 국내 유치를 방해하면서 결국 늦게까지 낙후성을 면치 못해 타 산업에 비해 뒤늦게 정착됐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50년대 초반 이전에는 홍콩 등지에서 염료를 수입해 사용했는데 수입제품이라도 염색한 상품이 비를 맞거나 세탁을 하면 색상이 빠지는 문제점이 자주 발생했다.

 

당시 국내 최초의 섬유 염색용 염료 제조업체인 이화산업이 P-아미노페놀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설퍼 올리브 제품합성에 성공,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해 놓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료공업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화산업의 창업주인 조명주 명예회장은 전량 수입하던 염료를 국산화하는데 한평생을 헌신하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국내 염료산업의 성장을 이끌어온 ‘염료업계의 대부’로 칭송받고 있다.

 

조명주 명예회장은 1907년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일제시대 때 유통업, 염료업으로 큰 돈을 벌은 후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1950년 3월 29일에 이화산업을 설립한다.

 

설립과 동시에 유화염료 생산을 시작, 1954년 국내 수요의 3분의 2를 공급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다. 같은 해 11월 국산품장려회가 주최한 제3회 전국국산품전람회에 출품, 외산 염료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평과 함께 상공부장관상을 수상한다.

 

1957년 직접염료 생산을 시작한 이화산업은 1962년 국내 최초로 염료수출에 성공하고 1963년에는 이화산업에서 생산한 국산염료 유화흑색을 태국, 베트남 등에 각각 12톤, 40톤을 수출한다.

 

▲ 1962년 당시 이화산업 신문광고  © TIN뉴스

 

1964년 상공부 통계에 따르면 당시 국산염료 생산업체 대원염료, 대광화학, 이화산업 중 이화산업의 생산실적은 648톤으로 전체 생산량의 65% 내지 83%라는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66년 염기성염료와 형광염료에 이어 1970년 반응성염료 생산에 성공한 이화산업은 1971년 염료산업의 국산화를 주도하기 위해 염료생산의 최종 단계인 분산염료 개발을 계획, 일본 스미토모사와의 합작으로 1천만달러를 투자해 영등포에 대규모 염료공장 건설한다.

 

당시 국내 섬유류 중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폴리에스테르계 섬유류의 염색은 외산염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이화산업의 분산염료 국산화 성공으로 외화를 절약하는 동시에 가득률 향상에도 크게 기여하게 된다.

 

1971년에는 태흥화학과 염료판매를 주 업무로 하는 한국염료판매주식회사를 설립, 나일론화스트 염료와 키치온 염료를 공급해 섬유업계가 집중해 있는 대구와 부산지역에 대한 판매망 강화에 주력한다.

 

1974년 당시 염료 수입규모는 약 3500만달러였는데 1975년 정부의 국산대체가능 품목에 대한 수입규제조치에 힘입어 염료업계는 국내 염료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에 대비 생산시설의 증설 및 신제품 개발 작업을 활발히 추진했다.

 

당시 외산염료 수입 축소를 앞두고 한일합섬, 제일모직 등 국내 우수메이커들도 이미 50%를 국산염료로 대체 사용했는데 주로 아크릴릭 섬유염료인 카치온 등에서 증설 및 판매경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화산업도 종전의 생산 능력인 월산 35톤을 70톤으로 늘리면서 전체 시설규모가 종전보다 30%정도가 증가하게 된다.

 

1982년 유정화학을 흡수합병한 이화산업은 1983년 초 영등포공장을 서인천에 옮겨 대지 3만평에 염료중간체 공장을 이전하고 고급염료 공장을 증설한다.

 

새롭게 증설한 인천공장에 최신시설과 컴퓨터장치를 도입하고 고급인력들을 유치해 염료업계에서는 처음으로 부설연구소를 설립한다.

 

특히 연구개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결과 종래 별도로 생산하던 비닐설폰계와 트리아지닐계의 반응성염료인 리파픽스(Rifafix)와 리파시온(Rifacion)의 복합구조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연간 1700만달러 상당씩 수입되던 면제품 반응성염료인 리파픽스와 리파시온을 국산화시키고 월 50톤씩 생산하기 시작한다. 또 계열회사인 삼명물산도 건염염료인 인디고 개발에 성공, 국내 수요의 수입을 대체시키는 성과를 이뤄낸다.

 

이화산업은 반응성염료 국산화를 계기로 기술서비스센터를 설립하고, 염료 및 중간체분야에 대단위 투자를 계속 확대, 1987년에는 중동의 알반사벳(Alvan Saabet)사에 염료 플랜트를 수출하며 해외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는다.

 

1988년 무역의 날에는 1천만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했으며, 1989년 1만5천톤의 설비능력을 갖춘 염료공급업체로 발돋움한 이화산업은 연간 생산능력 2천톤의 반응성염료 전용공장 증설에 착수한다.

 

이후 인천공장 내에 연건평 1800평 규모로 반응성염료 전용공장 3개동을 건설하고 반응성탱크, 보조탱크 등과 부대설비를 대폭 보완해 총 반응성염료 생산능력을 연 5천톤 규모로 증가시켰다.

 

1994년에는 15억원을 들여 인천 석남동에 있는 염료공장을 대폭 증설, 연간 생산능력이 700톤에서 1400톤으로 대폭 늘어난다. 또 3년간 6억5천만원을 투입, 새로운 화합물인 이관능 비닐 설폰기를 첨가해 개발한 반응성 액체염료 리파졸 블랙 BFL, BXL, GSL 등 3종을 상품화시킨다.

 

이화산업은 1993년 8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국내 염료시장의 25%정도를 차지했는데 당시 군소업체를 포함한 염료업체가 60여개에 달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화산업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또 국내보다는 외국에 더 잘 알려져 93년에는 40개국에 3500만달러를 수출했는데 특히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에만 1천만달러를 수출해 국제경쟁력을 인정받는다.

 

이화산업의 국제경쟁력은 세계적인 화학업체인 독일 바이엘이 독점하고 있던 LEVAFIX타입 염료를 국산화시켜 리화톤 브랜드로 국내에 시판해 연간 1백억원 이상의 수입대체 효과를 거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 2016년 상해 국제염료공업박람회(China Interdye 2016)에 참가한 이화산업 부스  © TIN뉴스

 

1991년 제25회 조세의 날에 산업포장을 수상했으며, 1994년 한국 증권거래소에 상장, 1995년 ISO 9002 인증과 2000년 ISO 14001 환경인증을 각각 획득했다.

 

창립 50주년을 맞은 2000년에는 유럽, 동남아 등 세계 50여개국에 염료를 수출, 국내에서는 시장점유율 1위를 지키며 880억원의 매출실적을 기록했다.

 

2001년 OHSAS 18001 안전보건경영인증을 취득하고 2002년 염료 및 유기안료제조업체(ETAD) 회원사로 가입, 2003년 QS 9000 인증을 획득했다. 2005년 이화상해염료유한공사를 설립하고 2007년에는 남북경협사업 염료지원사업에 참여했다.

 

2008년 GOTS(국제유기농섬유국제규격) 인증 획득, 2014년 인천 물류센터를 준공했으며, 2018년 블루사인 시스템 파트너 인증을 획득하며 친환경 염료시장에서 주목을 받았다.

 

정밀화학분야인 염료생산에만 매달려온 이화산업은 군복에 사용되는 국방색 염료를 생산, 납품으로 성장해 지금은 각종 의복뿐 아니라 산업용품에 쓰이는 다양한 염료를 생산하고 있다.

 

독일이나 일본을 따라잡는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신제품을 개발, 신시장을 창조하기 위해 기술력은 물론 명실상부한 세계 10대 염료업체로 도약한다는 목표아래 다양한 성장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70년 역사 속에서 흔들림 없이 전문화를 고집하고 있는 이화산업의 창업이념은 신용제일주의와 전문화를 철칙으로 삼은 조명주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된다.

 

2006년 9월 27일 향년 100세의 일기로 별세한 조명주 명예회장은 99세에도 이화산업 이사(비상근)를 맡아 유가증권시장 상장법인 중 국내 최고령 임원으로 기록될 정도로 회사와 염료산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줬다.

 

1980년대부터는 경영에서 손을 떼고 아들 조창환 회장과 손자, 그리고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지만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인천공장과 서울을 오가며 직접 장화를 신고 삽질을 했다는 게 당시 공장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특히 조명주 명예회장은 글로벌 시대에 맞는 실력 있는 인재양성에 역점을 두고 1956년 설립한 학교법인 제일학원을 1971년부터 이화산업이 운영하면서 대경정보산업고등학교, 대경중학교, 동산초등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1979년 교육헌장 11돌을 맞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으며, 1983년에는 자신의 호인 서정(墅亭)을 따서 서정학원으로 법인 명칭을 변경하고 2006년부터 아들인 조창환 회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9년 서울고총동창회와 인왕장학재단 현판식에 참가한 조창환(7회) 인왕장학재단 이사장 © TIN뉴스

 

조창환 회장도 선친에 뜻을 이어받아 서정학원 이사장 외에도 인왕장학재단, 창조장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인재양성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한 공로로 2013년 국민교육발전 유공자 정부포상에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했다.

 

한편, 조창환 회장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1973년 90kg이 넘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 골프를 시작한지 34일 만에 스코어 78타를 기록, 1년 반 만에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영광을 안았다.

 

하루 1천개, 한 달에 GMC트럭 한대 반 분량의 공을 치는 투지를 발휘했는데 최단 기간내에 싱글핸디캐퍼 대열에 들어서면서 1976년 포르투칼에서 열린 세계아마선수권대회에서는 국가대표로 출전한다.

 

전성기때인 1978년에는 18홀 최저타수 66타, 9홀 최저타수 30타를 기록하는 저력을 과시하며 세간의 관심을 이끌었다.

 

1982년에는 국가대표 골프코치로 제9회 아시안게임에 참가, 은메달 획득에 공을 세우며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훈했다.

 

1950년 대한민국에 처음 합성염료를 공급하기 시작한 이화산업은 1950년대까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염료생산을 하며 전시 국방수요는 물론 이후 혼란기의 어려운 국민생활에 유용한 흑색염료를 공급하여 대중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이화산업의 염료개발 역사는 우리나라 염료개발의 역사로서 현재도 대학의 염료학, 염색학 교재에 우리나라 염료공업의 발달의 일면을 소개하는 장에는 이화산업이 빠지지 않고 소개되고 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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