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신원그룹 창업주 

박성철(朴成喆)

1940~

 

▲ 신원그룹 창업주 박성철

의류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신원그룹의 창업주 박성철 회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수성가형 사업가로 맨손으로 일궈낸 토종 중견기업 ‘신원’을 통해 반세기 가까이 국내 패션산업의 세계화를 위해 앞장서왔다.

 

박성철 회장은 1940년 전남 신안군에 자그마한 섬 자은도에서 태어나 6살 때부터 음식 동냥에 나설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낸다. 어려운 형편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학업을 포기하게 되자 목포에 있는 중앙국립감화원에서 무료로 공부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친구 두명과 찾아 나선다. 

 

중앙국립감화원은 6.25사변 후 부랑아들을 모아놓은 임시수용소 지금으로 치면 학교보다는 소년원에 가까웠다. 낙심한 상황에서 선생님으로부터 하나님을 접하게 되면서 신앙에 의지하게 됐고 꿈을 포기하지 않고 5학년 과정을 마친 후 인근에 있는 정규학교에 6학년으로 편입하게 된다. 

 

▲ 1950년대 목포고등학교 본관 건물 사진  © TIN뉴스

 

1962년 신문 배달을 해가며 고학으로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졸업식에서 상으로 받은 영어사전까지 중고책방에 팔아 기차비를 마련해 서울로 상경한다. 1964년 한양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 후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1년 6개월 만에 등록금이 떨어지자 산업경제신문(현 헤럴드경제)에서 교정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교열 기자로 입사한다. 이후 7년 동안 정치부와 경제부 섬유담당 기자로 활동했는데 국회취재 중 동향이었던 당시 김대중 의원의 눈에 들어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때는 공보담당 비서를 맡기도 한다.

 

1971년 말 기자 시절 눈여겨보던 섬유산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섬유수출업자와 원사업자 등 인맥의 도움을 받아 자본금 1천만원과 편직기 7대, 직원 13명으로 수공업형태의 직물 하청공장을 운영하며 기업가의 길을 걷는다. 

 

삼도물산, 천지무역 등에 하도급 물량을 납품하다 1973년 서울 신길동에서 처가가 운영하던 스웨터하청공장이 경영난으로 폐업위기에 몰리게 되자 인수해 ‘신원(信元)통상’이란 회사로 무역업을 등록하며 ‘신원그룹’ 역사의 첫 시작을 알린다.

 

사업 초기 부족한 생산경험으로 다른 업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품차별화를 통한 고가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일찍부터 해외시장에 눈을 돌리고 덤핑수출이 판을 치던 중에도 고가품 위주로 수출시장을 꾸준히 확대했다. 

 

▲ 박성철 신원그룹 회장은 1987년 제24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스웨터 한 품목으로 1억달러 수출을 달성하며 패션의류업체로는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는 영예를 안았다.  © TIN뉴스

 

우리는 유태인 못지않은 잠재력 가져

세계 섬유패션의 중심지가 될 때

 

특히 1971년 대미 섬유쿼터제(수입할당제)가 타결되면서 쿼터 확보 경쟁이 치열했지만 신생업체라 수출 실적이 없어 쿼터를 받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판로가 막히게 되자 쿼터제가 없는 면이나 마 같은 자연산 섬유로 승부수를 띄워 스웨터 30만장을 미국에 수출하는 계약을 맺게 된다.

 

당시 국내에는 자연산 섬유가 없어 일본에서 마 51%, 아크릴 49% 조건으로 원단을 주문 수입해 스웨터 30만장을 생산했는데 검품 과정에서 마 49%, 아크릴 51%라는 점이 발견되면서 수출계약이 파기되는 큰 위기를 맞는다. 

 

회사가 파산할 정도의 위기였지만 원단을 납품한 일본 바이어는 물건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잘못이 더 크다며 책임을 전가했고 결국 일본 전역을 두 바퀴나 돌면서 물건을 팔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간신히 기사회생하게 된다. 

 

제품을 알아야만 수출상담도 유리한 고지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공장에 야전침대를 갖다놓고 70여명의 근로자들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재료와 옷감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다.

 

스웨터가 일손이 많이 가는 제품이어서 하도급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점을 감안, 하도급 공장을 분업-협업화 형태로 운영했다. 원-부자재 조달에서 품질관리, 신제품 개발에 이르기까지 계열화시켰고 하도급대금도 무조건 어음이 아닌 현금으로 지급했다.

 

▲ 마포구 도화동에 위치한 신원 본사 신원빌딩과 신원명동빌딩   © TIN뉴스

 

“우리는 사막에 스웨터도 수출한다. 맡겨만 주면 북극에서 냉장고도 팔 수 있다”

 

한편, 쿼터 때문에 미국, 유럽 시장 수출이 계속해서 어려워지자 중동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뜨거운 사막이 연상되는 중동이지만 밤에는 영하 10도까지 떨어지는 등 일교차가 높은 지역이 많다는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을 설득해 군용 스웨터를 수출한다.

 

또 수출 초창기인 1975년 영국에 납품한 스웨터 5백장 가운데 2장이 불량품이라는 바이어의 의례적인 국제전화에 다음날 곧바로 항공편으로 스웨터 2장을 보냈는데 이 같은 사실이 해외 바이어들에게 알려지면서 주문이 쇄도하기도 했다.

 

유럽은 안 가본 나라가 없고, 일본은 한 달에 한 번씩, 미국은 계절마다 방문해 직접 세일즈를 했다. 비쿼터 품목을 팔기 위해 이란,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이스라엘 등 쿼터 규제가 없는 나라를 대상으로 셀 수 없이 뛰어다녔다.

 

▲ 2014년 신원 박성철 회장이 우수대리점 12개사 사장들에게 상패를 수여하고 있다.  © TIN뉴스

 

무엇보다 신용을 최우선으로 삼아 선적기일 등 바이어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신원 제품은 고급이고 믿을 수 있다는 해외 바이어들의 믿음을 얻어내면서 60여개국에 거래처가 생겼고 지금까지도 거래선의 대부분이 유지되고 있다. 

 

특히 고가제품을 개발해 수출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80년대 일반 스웨터 수출단가가 피스당 2~3달러, 비싸야 10달러를 넘지 못했는데 최고 130달러짜리의 고가품을 수출했다. 특수 소재에 바이어의 기호를 맞추고 선진국들이 따라 하기 힘든 수공에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70년대 후반 2차 오일쇼크 속에서도 수출실적은 크게 늘었다. 정부의 수출드라이브정책을 등에 업으며 1980년 1천만 달러에 이어 1987년 1억2천만 달러, 1990년 1억5천만 달러의 스웨터 수출을 달성했다. 

 

▲ 신원 인도네시아 법인  © TIN뉴스

 

긍정적인 자세를 갖고 최선을 다하면

지구의 마지막 날까지 승산이 있다

 

1983년 스웨터 수출에 전력하면서도 신원종합개발을 설립해 건설업에 뛰어들었고, 1988년에는 신원월드를 세워 골프장사업을 시작했다. 1990년에는 신원랜드를 세워 콘도와 종합레저타운 건설에 나서는 등 경영다각화를 추진했다.  

 

1989년 직원 250명으로 수출실적 1억 달러를 기록하며 업계 정상을 지켜냈지만 주력수출시장인 미국 등지에서 국산 스웨터가 반덤핑제소를 당하는 등 수출 여건이 악화되자 이때부터 내수로 눈을 돌린다. 

 

1990년 서울 명동 등 4곳에 대형 패션몰 ‘에벤에셀’을 만들어 내수의 전초기지로 삼았으며, 오랜 기간 유명 브랜드 업체에 납품하면서 얻은 자신감으로 여성복 브랜드 ‘베스띠벨리(BESTIBELLI)’와 ‘씨(SI)’를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패션유통기업의 위용을 갖춰나갔다.

 

▲ 신원은 1990년 ‘베스띠벨리’와 ‘씨’를 선보이며 패션유통기업으로 위용을 갖춰나갔다.  © TIN뉴스

 

‘베스띠벨리’는 이탈리아어로 ‘가장 아름답다’는 뜻으로 당시 여성의 사회 진출과 함께 ‘커리어 우먼이 입는 옷’이란 인식을 심어주며 날개 돋친 듯 팔렸으며, 이탈리아어로 ‘예스’라는 뜻의 ‘씨’ 역시 대학생과 젊은 여성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시장에서 빠르게 자리 잡는다. 

 

여성복 인기에 힘입어 도전에 나선 남성복 브랜드 ‘지이크(SIEG)’는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정장으로 시장의 트렌드를 선점하면서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들에게 인기를 끌며 매출 1000억 원을 달성하는 효자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1991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스웨터 공장 건설을 시작으로 1997년 과테말라, 2002년 베트남, 2004년 개성공단, 2006년 중국 상해 현지 법인을 설립하는 등 해외 진출을 시도, 해외법인에서 만든 스웨터, 니트, 가죽 제품을 전 세계로 수출하고 있다.

 

▲ 개성공단에서 가장 큰 공장을 운영한 신원의 북측 근로자들의 아침 출근 모습  © TIN뉴스

 

특히 개성공단에서 가장 큰 공장을 운영했는데 총 18개 라인으로 북측 근로자 1400명이 하루 평균 5000벌, 월평균 10만 벌의 의류를 생산했다. 당시 개성공단을 통해 남과 북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셈이라며 강한 애착을 드러내기도 했다.

 

1976년 해외시장 개척상, 1980년 수출공로상, 1981년 석탄산업훈장, 1984년 5천만달러 수출탑, 1985년 동탑산업훈장, 1986년 1억불 수출탑, 1987년 스웨터 한 품목으로 1억달러 수출을 달성하며 패션의류업체로는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는 영예를 안았다.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성장, 1998년 이전 재계 순위 31위, 계열사만 17개, 연간 매출 2조원을 자랑했다. 하지만 전기·전자 등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1997년 IMF 외환위기 한파를 비켜가지 못하면서 1억5천만 달러의 빚을 지며 워크아웃에 놓인다. 

 

결국 섬유와 패션을 제외한 사업을 모두 접으면서 계열사들이 3개로 줄어들고 2500여명이던 직원을 700명으로 감원하는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거친다. 

 

구조조정 후에도 2000년에 525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등 국내 의류업계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면서 1조원이 넘었던 부채를 800억원대로 줄였고 5년만인 2003년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 박성철 신원 회장이 2013년 창립 40주년 기념 사업 발표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TIN뉴스

 

2013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패션기업을 뛰어넘는 토털 라이프스타일 전문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적극적인 인수합병과 생산 기지 설립, 브랜드 론칭, 중국 진출 등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하며 다시 한 번 승부수를 띄운다.

 

2012년 한국 브랜드 최초로 중국 카누딜로 복식고분유한회사와 남성복 지이크, 지이크 파렌하이트 2개 브랜드의 20년 독점 판매권 계약을 맺었고, 여성복 브랜드 ‘비키(VIKI)’도 중국 정영복장무역유한공사와 중국내 독점판매에 대한 15년짜리 계약을 맺었다.

 

중국 진출과 함께 악어·타조 가죽 명품 백을 만드는 65년 된 브랜드 이탈리아 ‘로메오 산타마리아’도 인수했고, 남성복 고급브랜드 ‘반하트 디 알바자’와 ‘이사베이’, ‘세스띠’ 등 3개의 신규 브랜드를 론칭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박성철 회장은 한국무역협회 이사, 스웨터수출조합 이사장, 한국의류산업협회 회장,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명품창출포럼 초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운영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1994년 한국경영대상, 2012년 한국표준협회가 제정한 ‘대한민국 좋은 기업 최고경영자상’을 수상했다.

 

박성철 회장이 생각하는 성공의 비결은 따로 없다. 수입을 규제당하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팔고 상대방의 약속을 철저히 지켜 믿음을 심어준다면 무역환경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뚫고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경하는 기업가는 교보생명 창립자 故 신용호 회장으로 신원이 수출에 전력을 기울이다 내수시장 진출을 고려하던 시점에 “국내 패션 브랜드를 만들어 글로벌 브랜드로 키워내라”는 조언을 해줬고 그때의 조언이 오늘의 신원을 만들었다 해도 과장이 아니라며 박성철 회장은 말하고 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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