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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코오롱 창업주 오운(五雲) 이원만(李源万)
코오롱 창업주 오운(五雲) 이원만(李源万)
‘나일론’ 들여온 ‘현대판 문익점’ 화섬시대 열다
기사입력: 2019/11/25 [13:04]  최종편집: TIN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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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뉴스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코오롱 창업주

오운(五雲) 이원만(李源万)

(1904~1994)

  

▲ 코오롱 창업주 오운(五雲) 이원만(李源万)     ©TIN뉴스

“나는 우리 동포들에게 의복을 주자고 결심했습니다. 헐하고 질긴 의복을 우리 동포들에게 입히고, 부녀자들을 빨래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양말 뒤꿈치를 꿰매는 고역의 생애를 그렇게 하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생애로 전화시키려고 했습니다.”

1963년 8월, 나일론 원사공장 준공식 기념사에서

 

고려시대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 씨 몇 개로 우리 백성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면, 현대에는 일본에서 나일론을 들여와 한국섬유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이원만 코오롱 창업주를 그에 비견할 수 있다.

 

이원만은 1904년 경상북도 영일군에서 아버지 이석정과 어머니 이사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까지 향리에서 한학과 4년제 사립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하고 흥해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 졸업했다.

 

1930년 영일군 산림기수보로 취직했다.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각고 끝에 자수성가하여, 1935년에는 아사히공예주식회사(朝工藝主式會社)를 설립했으며, 2년 후엔 ‘아사히피복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꿔달았다. 그곳에서 이원만은 작업 모자를 생산해 크게 성공하는 등 일찌감치 뛰어난 사업수완을 보였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대구에서 경북기업주식회사를 창립했으며, 1949년에 재일한국인경제동우회를 창립하여 부회장에 피선됐다. 1951년 삼경물산주식회사, 1956년 재일한국인무역협회 회장을 지냈다.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난 뒤 조국으로 돌아온 이원만은 우연히 일본에서 접한 나일론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뒤 1954년 코오롱그룹의 시발점이 된 ‘개명상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나일론을 수입 판매하기 시작했다.

 

▲ 1957년 뽕나무밭인 대구 신천동 일대에 코오롱의 전신인 ‘한국나이롱’ 공장이 들어선다.  © TIN뉴스

 

나일론은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며, 명주보다 고우며 값싸고 질기기까지 해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사업이 잘되자 3년 후인 1957년 4월 12일 대구 신천동 일대 뽕나무 밭에 자본금 2억원을 들여 코오롱그룹의 전신인 한국나이롱㈜을 설립하고 나일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다음해인 1958년 10월 12일에는 나일론 스트레치 공장을 완공했다.

 

일본에서 섬유무역으로 돈을 벌던 이원만이 나일론 공장을 한국에 설립할 결심으로 귀국했을 당시의 심경이 ‘나의정경 50년’이라는 회고록에는 “한국에 합섬공장을 첫 설립할 생각에 온몸이 떨리는 것 같다”고 적혀있다.

 

▲ 1963년 8월 국내 최초 나일론 원사 준공식에서 이원만 회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 TIN뉴스

 

스트레치 가공법은 나일론사를 가공해 촉감을 부드럽게 하는 것인데 한국나이롱㈜에서 나온 스트레치 나일론사가 양말 공장으로 공급되면서 본격적인 나일론 양말시대가 열렸다. 당시 전국 메리야스공업 생산의 10%에 머물던 실적은 30%로 증가, 나일론 양말의 붐을 일으켰다.

 

1963년 스트레치 공장 뒷편에 나일론 필라메트인 화섬사 시설을 착공, 1964년 1월 1일부터 2.5톤의 나일론 원사를 생산함으로써 비로소 화섬시대가 개막하게 됐다.

 

특히 이원만은 평소 사업이라는 것은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하는 게 아님을 강조하며, 국리민복이 병진되는 이른바 상지상(上之上)의 사업을 추구했다. 수평선 위는 ‘상(上)’이요 아래는 ‘하(下)’인데, 국가와 개인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사업이 바로 ‘상지상’이라는 것이다.

 

당시 여성들은 매일같이 남편과 자식의 의복을 빨고 구멍 난 양말 뒤꿈치를 수시로 꿰매야 하는 등 고역을 겪어야 했는데 질기고 튼튼한 나일론은 문익점 선생의 목화에 버금가는 우리나라 의생활의 혁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원만은 수출에도 눈을 돌려 한국나이롱㈜의 제품은 홍콩, 이란, 아프리카, 미국, 동남아 등 해외에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 <사진 좌측> 在日本 商工人 제품을 全經聯 전시실에서 살펴보는 朴正熙 의장. (박의장 왼쪽이 박태준 상공위원장, 오른쪽 李漢垣 한국제분회장, 맨끝 이원만 위원장) <사진 우측> 1971년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준공식(구미공장)장면.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했다.  © TIN뉴스

 

또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 의장에게 농공병진공업입국·수출입국을 건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방향을 제시했다.

 

한국이 공업국가로 나가가야 한다며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박정희 대통령에게 오늘날의 구로공단과 구미공단 설립을 건의하고 사업을 주도했다.

 

그곳에서 섬유류, 플라스틱, 피혁, 전자기기 등 제조업을 중심으로 수출산업을 이끌었고, 한국을 수출 강국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1968년 대통령상, 1977년 은탑삽업훈장을 수여했다.

 

▲ 1963년 이원만은 한국수출산업공단지의 창립위원장을 맡고, 그해 대구에 ‘한국나이롱(주)’ 원사 공장이 건립된다. 박정희 의장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게획의 첫 사업이 완성됐다"고 선언했다. 당시 생산된 원사는 ‘나일론6’ 이름은 ‘코리아 나일론(Korea Nylon)의 합성어’ ‘코오롱(KOLON)’으로 붙여졌다.  © TIN뉴스

 

1972년에는 한국나이롱과 한국폴리에스텔(1971년 지어진 공장)을 통합해 ‘코오롱그룹’을 만들었고, 1976년, 코오롱그룹 회장, 1977년 코오롱그룹 명예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77년 아들인 故 이동찬 명예회장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줬으며 1994년 91세로 삶을 마감했으며, 그해 금탑산업훈장이 추서됐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1994 금탑산업훈장 수훈

1981 오운문화재단 이사장

1977 코오롱 명예회장

1976 코오롱그룹 회장

1972 한국나일론·한국폴리에스텔 명예회장

1963~1971 6, 7대 국회원원(대구東 공화)

1962 수출산업공단 이사장

1960 참의원(경북 민주)

1951 한국나일론 사장

1951 재일한인무역협회 회장

1950 삼경물산㈜ 사장(일본)

1949 재일한인 경제동우회 부회장

1941 일본대학 중퇴

1937 아사히피복 사장

1935 아사히공예 사장

1930 경북 영일군 산림기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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