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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림 디자이너
Wilhelm Scream
Wilhelm Scream(윌헬름의 비명)
디자이너 이학림 칼럼
기사입력: 2018/04/06 [14:08]  최종편집: TIN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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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뉴스

▲  영화 ‘머나먼 북소리(Distant Drums)’ ,  ‘페더강의 전투(The Charge at Feather River)’     © TIN뉴스

 

라울 월시 감독의 1951년작인 ‘머나먼 북소리(Distant Drums)’ 중, 한 병사가 악어에게 물려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생사의 기로에 선 그 병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다. 전쟁 영화 속에서 상황은 다르지만 수도 없이 보아온 죽음의 순간이다.

 

다만, 이 병사가 냈던 “아아(음이탈)↗아으↘으”라는 비명소리(정확히는 이후에 더빙 된)는 죽어가는 사람의 소리라고 하기에는 다소 웃긴 소리였고, 더빙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것 같다.

 

1953년 영화인 ‘페더강의 전투(The Charge at Feather River)’에 등장하는 ‘윌헬름 일병’은 극중 허벅지에 화살에 맞고 괴로움에 소리를 지르게 되는데, 여기서 앞선 영화의 “아아↗아으↘으”라는 소리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 영화가 대히트를 치게 되면서, 뭔가 묘하게 웃기는 이 이상한 비명소리는 ‘윌헬름의 비명(Wilhelm Scream)’이라는 이름으로 헐리웃 영화의 죽음 장면에서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일종의 문화코드가 된다.

 

▲   ‘윌헬름의 비명(Wilhelm Scream)’   © TIN뉴스

 

“아아↗아으↘으”

 

이 사운드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영화에서 사용되었는가를 나열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50년대 서부영화에서부터 스타워즈나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를 거쳐 반지의 제왕이나 토이 스토리,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같이 당연히 보아왔던 영화들 어딘가에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묘하게 웃긴 윌헬름 비명은 결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컨텐츠가 아니라 지극히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컨텐츠라는 점이다. 아마도 이 소리가 묘하게 재미있다는 점이 음향기사들 사이에서 일종의 코드로 간주되었고, 누군가가 이 소리를 다른 영화에도 삽입하게 되었다.

 

그런 자잘한 디테일 놀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여기저기에 삽입되기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그 소리가 반복적으로 영화에 삽입되고 있다는 것을 찾아내고 하면서 마치 예전 디씨인사이드의 ‘필수요소’처럼 헐리웃 영화의 의도적인 클리셰(cliché)로까지 확장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어떤 감독도 자기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저는 윌헬름 비명을 사용했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떤 영화도 “저희는 의도적으로 윌헬름 비명을 삽입했습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장면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즉 윌헬름 비명이라는 코드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은 아무 의미 없이 넘길 수 있는 그 작은 순간에 낄낄거리면서 웃을 수 있는 요소, 바로 그런 것이 이른바 ‘코드’이며, 윌헬름 비명이라는, 별 것도 아닌 비명소리가 갖는 문화적 힘일 것이다.

 

누군가 상업적인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거나 선동에 의해 주입된 것들이 아닌, 자연발생적으로 우연하게 생겨나 많은 사람들의 자연스런 호응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는 어떤 것들 것에 우리는 ‘클래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 표현은 패션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단순히 서양식 수트만을 일컫는 표현이 아니라, 리바이스 청바지라던가 나이키의 ‘에어포스 1’처럼, 자연스럽게 입소문을 타고 퍼져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들, 그것들을 클래식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클래식 아이템에는 대부분 나름대로의 스토리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리바이스의 대표적인 클래식 라인인 ‘501’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껏 특유의 헐렁한 핏(fit)과 알루미늄 단추로 채우는 방식의 버튼 플라이(button fly), 그리고 빨간색 리바이스 택이 달린 채 생산되고 있으며, 당시 프랑스에서 수입한 데님을 쌓아 두었던 창고의 번호가 501번이었다는데서 유래한 코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리바이스 501의 스토리이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편의점인 세븐 일레븐 역시, 달라스 지역에서 우유나 계란, 빵 등을 얼음 위에 놓고 신선하게 판매하던 조 C. 톰슨이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새벽 7시부터 밤 11시까지 영업을 한다는 특성을 반영하여 만든 이름이라는 스토리가 있다.

 

또 조향사 측에서 1~5번, 20~24번까지의 숫자가 붙은 샘플 중 마음에 들었던 5번 기호가 붙은 향수를 선택한데서 유래한 그 유명한 샤넬 No.5까지,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제품들은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알고 보면 또 재미있는 나름대로의 스토리와 코드들을 품고 있다.

 

단, 이 모든 것들은 결코 의도적으로 제품의 판매를 위해 만들어지거나 덧씌워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사실은 별 것 아닌 작은 우연들이 겹치면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샤넬 No.5의 이야기가 알고 보니 제품 홍보를 위해 만들어진 가짜 이야기였다면 그것만큼 진부하고 식상한 돈의 논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안타까운 점은, 한국의 브랜드들, 특히 패션 브랜드들 중에는 클래식이라는 표현을 붙여 줄 만한, 또 그런 스토리나 코드를 가진 브랜드가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스토리와 적당히 다듬어진 컨셉 하에서 생겨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아메리칸 헤리티지’를 표방하는 모 브랜드가 내세우는 것은 결국은 폴로 랄프로렌이나 타미 힐피거가 모두 만들어 놓은 그것들을 답습하는데 그친다거나, 아메리칸 캐주얼을 표방한다는 모 브랜드는 결국 리바이스나 갭에서 수 십 년 동안 해왔던 것들을 따라하고 있다.

 

또 이탈리아 감성을 표현한다는 모 브랜드는 대표적으로 프라다의 지난 컬렉션들을 조금 다르게 베껴놓고 그것을 ‘재해석’이라고 궁색하게 표현하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브랜드들이 이제껏 해오고 있는 관행이다.

 

거기에는 문화도, 철학도, 코드도, 아울러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것들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돈을 쓰면 그만이라는, 다분히 천박한 돈의 논리만이 자리 잡고 있다.

 

‘윌헬름 비명’은 이른바 ‘그들만의 코드’이다. 딱히 수준 높은 무언가도 아니고, 성우의 목소리가 대단히 훌륭하다거나 유명 성우의 목소리인 것도 아니다. 딱히 문화적 가치를 운운할 만큼 어떤 중량감을 갖는 컨텐츠도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러분이 헐리웃 영화를 본다면 수 십 년이 지나도 언젠가 어디선가 “아아↗아으↘으”라는 비명을 계속해서 듣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윌헬름의 비명은 이미 클래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매출에, 가짜 이미지를 만드는데 연연하기 보다는, 철학이 확고하고 자기만의 스토리가 담긴 브랜드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열정이, 의지가, 고집이 꺾이지만 않는다면 시간이 더 지난 언젠가 대한민국에도 클래식 레이블이 몇 정도는 남아있지 않을까?

 

▲ 20CFBB CHIEF 디자이너 이학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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