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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호의 섬유역사산책
궁예(후고구려, 태봉)시대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③
궁예(후고구려, 태봉)시대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③
박원호의 섬유역사산책-11
기사입력: 2017/06/06 [11:07]  최종편집: TIN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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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뉴스
▲ 철원 삼부연폭포는 드라마 <대왕의 꿈>, <전우치>의 배경이기도 했다. 철원 8경중 하나인 삼부연폭포는 3단폭포로 가마솥처럼 생긴 소 3개를 만들어놓았다 하여 삼부연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궁예가 철원을 태봉의 도읍으로 삼을때 이 소에 살던 용 3마리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도를 닦던 용이 하늘로 승천하며 만들어진 3개의 구덩이가 3개의 가마솥과 비슷해 붙여졌다고도 한다. 또 1000년동안 심한 가뭄에도 마른적이 없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 TIN뉴스

 

 

◈ 삼국사기에 수록된 궁예(후고구려)의 역사와 그 풍속

 

◎ 궁예에 대하여

 

고려 태조가 청주(靑州) 사람 한찬(韓飡) 총일(聰逸)에게 이르기를, “태봉주가 청주 고을이 토지가 비옥하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으므로,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 그리하여 윤전(尹全), 애견(愛堅) 등 80여명의 군인이 모두 죄가 없는데도 칼을 씌워 끌려 가고 있는 도중이니, 경은 빨리 가서 그들을 전리(田里)에 놓아 보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기졸(騎卒) 태평(泰評)을 순군낭중(徇軍郞中)으로 삼았다. 평(評)은 서책을 많이 보아 행정에 밝았으므로 일찍이 염주(鹽州)의 적장인 유긍순(柳矜順)의 기실(記室)이 되었었는데, 궁예가 긍순을 쳐부수자 평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그가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은 데에 화가 나 군졸로 편입시켰으므로 드디어 태조에게 속했는데, 건국할 때에 참가하여 공이 있었던 것이다.


소판(蘇判) 종간(宗偘)과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犾鈇)가 죽음을 당하였다. 간(偘)과 부(鈇)는 모두 간사함과 아첨으로 궁예의 사랑을 얻어 어질고 착한 이들을 참소하여 해쳤으므로, 임금이 즉위하자 맨 먼저 이들의 목을 베었다.


은사(隱士) 박유(朴儒)가 와서 임금을 뵙자, 임금이 예를 갖추어 그를 접대하고 이르기를, “다스림을 이룩하는 도리는 오직 어진 사람을 구하는 데 달려 있는데, 이제 경이 왔으니 부암(傅巖)과 위빈(渭濱)의 선비를 얻은 것과 같다”라고 하고, 관대(冠帶)를 내려 주고, 그에게 명하여 기무(機務)를 맡게 하였으며, 왕씨(王氏)의 성(姓)씨을 내려 주었다.


유(儒)는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달하였다. 일찍이 궁예에게 벼슬하여 원외(員外)가 되었다가 벼슬이 옮겨져서 동궁기실(東宮記室)에 이르렀었는데 궁예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드디어 집에서 나와 산골짜기에 숨었다가 새 임금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온 것이다.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이흔암(伊昕巖)을 저자에 내어 죽였다. 흔암은 무인(武人)으로 이익을 취하는 데 조급하였고 궁예를 섬겨 은밀한 일을 탐지해 바치는 것으로 신임을 받았었다.


궁예의 말년에 이르러 웅주(熊州)를 습격해 빼앗았으므로 그대로 그 곳을 지키게 하였었는데 임금이 즉위한 소식을 듣고 몰래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서,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떠나오니 사졸들이 많이 도망해버렸으므로 웅주가 다시 후백제의 소유가 되었다.

 

 

▲  궁예가 앉아 군사들의 해동을 내려다 보며 군사 지휘를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명성산 궁예바위   © TIN뉴스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 염장(閻萇)이 흔암과 서로 이웃에 있었으므로 그 음모를 알고 임금에게 자세히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흔암이 지키던 땅을 버리고 제 마음대로 와서 변경의 땅을 잃었으니, 그 죄는 실로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군을 섬겨 그전부터 정분이 있었으니 차마 죽일 수는 없는 데다가 그 반역한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저도 반드시 변명할 말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염장이 은밀히 사람을 시켜 흔함을 살펴보도록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내인(內人)을 염장의 집으로 보내어 장막 안에서 흔암의 집을 엿보게 하였는데, 흔암의 아내 환씨(桓氏)가 뒷간에 갔다가 그 곳에 사람이 없는 줄로 알고 오줌을 누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남편의 일이 만약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당할 텐데”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들어가 버렸다.


내인이 사실대로 아뢰자, 드디어 흔암을 옥에 내려 가두니 모두 자백하였다.


백관(百官)에게 그 죄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 아뢰기를, “마땅히 목을 베어야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친히 흔암을 꾸짖어 이르기를, “네가 평소부터 흉한 마음을 먹고 있다가 스스로 죽을 죄에 빠졌구나. 법이란 것은 천하의 공정한 것이니, 사사로운 정 때문에 법을 어지럽힐 수는 없다”라고 하니, 흔암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목을 베게 하고 가산을 적몰(籍沒)하였으나 그 도당들에게는 죄를 캐묻지 않았다.


같은 해 가을 7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태봉주가 백성을 괴롭혀 제 욕심을 채워서 오직 거둬들이기만 하고 옛날 제도를 따르지 않아 토지 1경(頃)에 조세(租稅)를 6석이나 받으며, 역(驛)에 소속된 호(戶)에 사(絲 ; 실)를 3속(束 ; 묶음. 단)이나 부과하여 드디어 백성이 농사를 걷어치우고 길쌈을 그만두고서 떠돌아다니고 도망하게끔 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는 조세의 부과는 마땅히 천하에 공통된 법을 써서 상례(常例)로 삼으라”라고 하였다.

 

 

▲ 궁예와 명성산은 일찍이 잘 알려져 있다. 폭정을 못이긴 백성들과 그 반란군의 수장 왕건으로부터 도망치게 된 궁예가 바로 이 곳 명성산까지 쫓겨와서 군대를 해산하였고, 그 때의 울음소리가 산 전체에 울렸다고 하니, 왕에서 도망자 신세였던 그 스스로가 매우 한탄스러웠겠다. 명성산의 정상 923m로 철원에 속해 있으며, 저 유명한 전설의 시작점이기도 한 궁예 능선과 약물계곡 역시 철원 지역이다. 산의 남북을 각각 포천과 철원이 나누고 있다. 걷는 거리는 정확히 4km이며, 시간은 2시간 30분 가량 소요된다.     © TIN뉴스

 

 

◎ 동사강목에 수록된 궁예(후고구려)의 역사와 그 풍속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894년 신라 진성 여주 8년 겨울 10월, 궁예가 명주(溟州)를 침략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궁예가 북원으로부터 명주에 침입할 때 무리가 3천5백명이었다. 신라 본기에는 “무리가 600명에 이른다”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본전(本傳)에 따랐다.


이것을 14대(隊)로 나누고 김대(金大)와 검모(黔毛), 흔장(昕長), 귀평(貴平), 장일(張一) 등으로 사상(舍上)을 삼았는데, 사상은 부장(部長)을 말한다.


궁예가 사졸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고 주고 뺏는 것을 사사롭게 하지 않으니, 부하가 마음으로 외복(畏服)하고 애경(愛敬 ; 경예)하였다. 그러므로 드디어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895년 신라 진성 여주 9년 가을 8월, 궁예가 한주에 침입하여 철원(鐵圓) 등 10여군을 함락하였다. 궁예가 저족(猪足 ; 인제), 성천(狌川 ; 낭천) 2군에 침입하여 점령하고, 다시 한주 관내의 부약(夫若), 철원 등 10여군을 깨뜨리니, 군세가 매우 성하여 패수 서쪽의 도적들이 와서 항복하는 무리가 많았다.


이에 궁예는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칭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비로소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궁예가 왕건(王建)을 철원군 태수로 삼았다. 왕건은 한주 송악군(松岳郡) 사람이다. 처음에 왕건의 아버지 융(隆)은 기우(器宇)가 커서 삼한을 병탄(並呑)할 뜻이 있었다.


한씨(韓氏)와 결혼하여 집을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부 진산(鎭山) 남쪽에 지었는데, 중 도선(道詵)이 문앞의 나무 아래에 와서 쉬면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땅에 마땅히 성인(聖人)이 출생하겠다”라고 하였다.

 

 

▲  조선시대 사진에 보이는 태봉국 도성내에 남아있는 거대석등.(풍천읍 위치). 이러한 석등 규모만 보아도 이 궁궐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 TIN뉴스

 


왕륭이 이를 듣고 신을 거꾸로 신으며 나와 맞이하였다. 두 사람이 함께 송악산에 올라가서 산수의 맥(脈)을 살핀 다음에 도선이 글 1통을 써서 봉하고 그 외면에 쓰기를, “삼가 이 글을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인 대원(大原) 군자 족하에게 드립니다”라고 쓰고, 왕륭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공이 명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가 장성하거든 이것을 주시오”라고 하였다. 그 편지는 비밀히 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 기일에 미쳐 과연 왕건이 탄생하였으니, 곧 신라 헌강왕 3년 정월 병술(丙戌 ; 14일)이었다. 그가 날 때에 신기한 자색 기운이 종일토록 둘러싸고 뜰에 가득하게 서렸으며, 그 돌아가는 모양이 마치 교룡(蛟龍)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용안(龍顔) 일각(日角)에 턱은 모나고 이마는 넓으며, 기우(器宇)가 크고 깊으며, 말소리가 크며,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왕건의 나이 17세에 도선이 다시 와서 보기를 청하고 말하기를, “족하는 백육(百六)의 모임을 만났으니 말세의 창생들이 공의 넓은 구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고, 인하여 군사를 출동하고 진(陣)을 설치하는 지리(地理)와 천시(天時)의 법도 및 산천(山川)을 망제(望祭)하여 감통(感通)하고 보우(保佑)하는 이치를 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건이 궁예에게 가서 의지하니, 궁예가 이 관직을 제수한 것이다. 이때 왕건의 나이 19세였다. 도선은 영암(靈巖) 사람으로 성씨는 김씨이다. 혹은 태종무열왕의 서손(庶孫)이라고도 한다. 나이 15세에 중이 되었는데, 해를 지나지 않아서 대장경(大藏經)을 다 통달하고, 호를 신총(神聰)이라 하였다.
헌강왕이 일찍이 그를 맞아 금중(禁中)에 머물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돌아갔다.

 

▲  철원군청에 설치된 궁예도성 모형. 분단으로 남북한 민간인들의 접근이 반세기 이상 철저히 통제되고 있는 특성상 인공위성에 잡힌 도성 흔적을 토대로 3중성(왕궁성 둘레 1.8km, 내성 7.7km, 외성 12.5km)의 모습을 재현했다.    © TIN뉴스

 


그가 이인(異人)을 남해의 물가 지금의 구례현(求禮縣) 사도촌(沙圖村) 에서 만났는데, 모래를 모아 산천의 순하고 역한 형세를 만들어 보였다.


이로부터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방술을 활연히 통달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도선이 당(唐)나라에 건너가서 일행(一行 ; 당나라 고승)의 지리법(地理法)을 전수받았다”라고 한다.


산을 밟고 물을 관찰하여 신기한 징험이 많이 있으므로, 드디어 동방 감여(堪輿 ; 풍수지리) 술수(術數)의 시조가 되었다. 신라 진성 여주 9년으로부터 3년 뒤인 무오년인 898년에 죽었다. 여주가 서석학사(瑞石學士) 박인범(朴仁範)에게 명하여 비문을 지었다.


896년 신라 진성 여주 10년, 적고적(赤袴賊)이 신라 서울 서쪽에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도적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일어났는데, 빨간 빛깔의 바지를 입어 특이하게 하였기 때문에 ‘적고적’이라고 불렀다.


주현에 큰 해를 끼치고 서울 서부 모량리까지 와서 노략질해 갔다. 궁예가 승령(僧嶺), 임강(臨江)의 2현을 빼앗았다. 궁예가 왕륭을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고, 왕건을 발어참성주(勃禦槧城主)로 삼았다.


이때 왕륭은 송악군 사찬(沙粲)이 되었는데, 송악군을 가지고 궁예에게 귀부(歸付)하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그를 금성태수로 삼았다. 왕륭이 궁예에게 말하기를, “대왕이 만일 조선(朝鮮 ; 고조선)과 숙신(肅愼), 변한(卞韓)의 땅에서 임금이 되고자 하면 먼저 송악에 성(城)을 쌓고, 나의 맏아들 건(建)을 그 성주로 삼는 것만 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궁예가 그 말에 따라 발어참성(개성부 귀인문, 속칭 보리참문)을 쌓게 하고, 이어서 성주로 삼은 것이다.

 

 

▲  10월 축제 철원 태봉제는 6·25 전쟁 당시 철원군의 수복일인 10월 21일을 철원 군민의 날로 제정한 것을 기념하고자 1982년부터 개최되었다. 태봉제의 '태봉'은 신라 말기 궁예에 의해 건국된 옛 태봉국(910~918년)을 의미하며, '태봉국'을 건국한 궁예양의 은덕을 기리기 위한 태봉제례, 궁예왕 어가행차 퍼레이드 및 즉위식이 진행된다.   © TIN뉴스

 

 

◎ 해동역사에 수록된 궁예(후고구려)의 역사와 그 풍속해동역사에 의하면

 

살펴보건대, 태봉국(泰封國)의 옛날 수도는 지금(조선)의 철원부(鐵原府)에 있었다. 임금은 궁예(弓裔)로, 성(姓)씨는 김씨(金氏)이며, <통감 및 남당서에는 태봉(泰封)이 태봉(太封)으로 되어 있고, 궁예(弓裔)가 궁예(躬乂)로 되어 있다>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서자(庶子)이다.


891년 신라 진성주(眞聖主) 5년 신해에, 북원(北原 ; 지금 조선의 원주)의 도적인 양길(梁吉)에게 투탁하여 장군으로 추대되었고, 송악군(松岳郡)을 근거지로 하여 나라를 열고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고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그 뒤 철원의 풍천원(楓川原)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성책(聖册)으로 연호를 고쳤으며,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으며, 그 뒤에 또 정개(政開)로 연호를 고쳤다.


891년 당나라 소종 대순 2년 신해에, 나라를 세워다가 918년 후량(後梁) 말제(末帝) 정명(貞明) 4년 무인에, 고려의 태조에게 멸망되었으니, 총 28년간 존속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919년 후량 균왕(均王) 정명 5년의 일이다. 이에 앞서 당(唐)나라가 고려(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천우(天祐) 초에, 고려 석굴사(石窟寺)의 묘승(眇僧) 궁예(躬乂)가 무리를 끌어 모아 개주(開州)에 웅거하고는 스스로 임금이라고 칭하였다.

 

 

▲ 궁예가 나뭇가지를 한번 휘두르자 성이 지어졌다는 보개산성     © TIN뉴스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묘승이란 중 가운데 애꾸눈을 가진 중이다. 이곳에서 말하는 개주는 고려에서 설치한 것으로, 평양(平壤)의 동쪽에 있다. 지금은 고려에서 국도(國都)로 삼아 개성부(開城府)라고 하며, 또한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하는데, 그 지형은 왼쪽에 시내가 있고, 오른쪽에 산이 있다”라고 하였다. 국호를 태봉(太封)이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좌량위(佐良尉) 김입기(金立奇)를 파견하여 오(吳)나라에 조공하였다.


전당시(全唐詩)에, 917년 당나라 정명 3년에, 저자거리에 어떤 이인(異人)이 나타나 고경(古鏡)을 팔았는데, 거기에는, “3수(三水) 가운데 있는 4유(四維) 아래 상제(上帝)가 진마(辰馬)에 아들을 내려 보내 먼저 계(鷄 ; 닭)를 잡고, 뒤에 압(鴨 ; 오리. 압록)를 치리라. 사년(巳年) 중에 2용(龍)이 나타나, 한 마리는 청목(靑木 ; 파란 빛깔의 나무) 가운데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흑금(黑金 ; 까만 빛깔의 쇠)의 동쪽에 형체를 드러내리라”라고 쓰여 있었다.


문인(文人) 송함홍(宋含弘)이 이것을 해석하기를, “‘3수 가운데 4유 아래 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 보낸다’라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가리킨 것이다. 사년 중에 2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파란 빛깔의 나무 가운데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까만 빛깔의 동쪽에 형체를 나타낸다에서, 파란 빛깔의 나무는 송(松 ; 소나무)을 일컫는 것으로, 송악군(松岳郡)의 사람으로서 용(龍)으로 이름자를 쓴 사람의 자손이 군왕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까만 빛깔의 금(金)은 철(鐵)을 일컫는 것으로, 철원(鐵圓)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지금 임금이 처음에는 철원에서 융성해졌다가 마침내는 이곳에서 망한다는 뜻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왕시중(王侍中 ; 왕건)이 나라를 얻은 뒤 먼저 계림(鷄林)을 잡고 뒤에 압록(鴨淥)을 거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궁예가 거울을 팔던 이인을 찾게 하였는데, 동주(東州)의 발삽사(勃颯寺)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이 그녀의 모습과 같았다.


자치통감에, 922년 후량 용덕(龍德) 2년에, 태봉(太封)의 임금 궁예(躬乂)가 성품이 잔인하였으므로, 해군통수(海軍統帥) 왕건(王建)이 그를 죽이고, 스스로 서서 다시 고려 임금이라고 칭하였다.


남당서에는, “고려는 오대(五代) 초에 이르러서 나라 이름을 태봉(太封)이라 하였는데, 임금의 이름은 궁예였다. 궁예는 만년(晩年)에 들어서 사람들을 잘 죽였다. 922년 오(吳)나라 순의(順義) 2년, 바로 양(梁)나라의 용덕(龍德) 2년에 해당되는데, 해군통수 왕건이 궁예를 죽였다. 그런 다음 왕건이 스스로 임금이 되어 태봉이라는 나라 이름을 버리고, 다시 고려(高麗)라 칭하였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918년 궁예(弓裔)는 정명(貞明) 4년 무인에 이미 죽었다. 그러니 자치통감에서 5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한 것과 용덕 2년에 왕건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한 것은, 동사(東史)와는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끝>

 

▲ ©TIN 뉴스

 

 

 

 

박원호 TINNEWS 논설위원

(재)섬유패션정책연구원 사무국장

whpark@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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