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행복 담론이 바뀌고 있다. ‘행복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너무 행복하지도 너무 불행하지도 않은 일상,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와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9월에 발간한 ‘트렌드코리아 2025’에서 그저 ‘무난하고 무탈하고 안온한 삶’을 가치 있게 여기는 태도를 ‘아주 보통의 하루’를 줄여 ‘아보하(Nothing Out of the Ordinary)’라고 명명했다.
트렌트코리아는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힘든 사회에서, 오늘을 힘껏 살아낸 것만으로 스스로 대견하지 않은가? 꼭 행복까지 이르지는 않았더라도 말이다. 누군가는 보통의 하루에 집중하는 시 대해 도전 정신이 없다거나, 너무 지쳐서 그런 것이라는 평가를 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게으른 것도, 탈진한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자 하는 삶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고 진단했다.
아보하는 2018년 발간한 트렌드코리아의 최대 키워드였던 행복의 과시로 변질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대한 피로이자 반발이다. 소확행은 우리나라 젊은 세대를 휩쓸었던 키워드였다. 그러나 소확행은 어느덧 “네가 더 행복하니 내가 더 행복하니”소확행 경쟁으로 변질됐다. 이러한 소확행 과잉 경쟁은 피로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아보하에 대해 작더라도 확실하게 행복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과시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행복을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을까?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계층 간의 격차가 더 견고해지고 있으며, 자랑으로 가득한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 지도 오래다.
무언가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일상적인 소비가 우리가 숨쉴 수 있는 안전지대일지도 모른다. 특별한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오늘은 아주 보통의 오늘은 중요하다라고 설명했다.
하나의 사례로 밸랜스 게임(Balance Game), 즉 1번과 2번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밸런스 게임이 있다. 예를 들어 1번 ‘나는 평생 집에만 있고 밖에 나가지 못한다’. 2번 ‘평생 밖으로만 싸돌아다니고 집에 들어가지 못 한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면 된다.
그러나 결과는 놀랍다. 평균 연령이 60대에서 90%가 ‘(1번) 밖에 있겠다’고 선택한 반면 19·20세에서는 95%가 ‘(2본)집에 있겠다’는 선택을 했다. 요즘 집돌이와 집순이가 많다.
그냥 집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좋다는 젊은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과거 아버지 또는 60대 이상 세대의 경우 집에는 TV도 없고 고작 무협지 외에는 즐길 만한 것들이 없어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요즘 10·20대는 스마트폰, 노트북 또는 PC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김난도 교수는 트렌드코리아 2025를 통해 “평범한 일상은 가장 특별하고 성공한 사람에게도 기본으로 깔려야 하는 가장 안온한 안전지대다. 하물며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무한질주를 벌이고 있는 필부필부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특별한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오늘은, 아주 보통의 오늘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남에게 과시하지 않고 나에게 집중
또 다른 사례로 최근 서점의 취미서적 코너에서 1위는 ‘뜨개질’ 관련 책이다. 2030세대에서 뜨개질이 인기다. 도서시장에는 좋은 책의 글귀를 그대로 옮겨 적는 ‘필사(筆寫)’가 인기다.
한국 소비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쓴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다소 비싸도 이왕이면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려고 하고, 그 중에서도 명품을 선호한다. 이렇듯 소확행마저 그 진정한 의미를 잃고 변절됐지만 남에게 과시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소비를 하며, 아보하를 보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비싼 명품 가방 대신 그나마 저렴한 명품 립스틱을 사고 SNS에 올리는 것이 ‘변질된 소확행’이라면 아보하는 명품 립스틱 대신 ‘고품질의 기능성 치약을 구매’하는 것이다.
요즘 좋은 치약을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늘었다. 올리브영에 따르면 2023년 치약 카테고리 매출은 전년 대비 45% 급증했다. 특히 일반 치약보다 3배 비싼 ‘유시몰’, ‘치약계의 샤넬’이란 별명이 붙은 마비스(Marvis) 치약 매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명품 가방을 사면 좋지만 능력이 안 되니 대신 립스틱을 사서 작은 행복을 느낀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 좋은 치약으로 양치질을 하면 상쾌하고 내 기분만 좋으면 된다. 좋은 치약은 SNS에 올라온 명품 립스틱과는 달리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주 사적인 즐거움이다. 소확행과 아보하의 차이는 ‘립스틱과 치약’의 차이다.
‘원영적 사고’ 긍정 신드롬
다음으로 긍정적 사고가 늘어났다. 가능한 좋게 생각하려는 것. 요즘 ‘원영적 사고’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걸 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이 빵을 사려고 기다리다 자신 앞에서 빵이 떨어졌다. 보통은 “재수 없어”라고 말할 테지만 장원영은 “앞 사람이 제가 사려는 뺑 오 쇼콜라를 다 사가서 너무 럭키하게 제가 새로 갓 빵을 받게 됐지 뭐예요? 역시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다”라는 내용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면서 원영적 사고라는 신조어와 함께 긍정 신드롬이 일었다.
‘원영적 사고’는 단순 긍정적인 사고를 넘어 초월적인 긍정적 사고를 의미한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로 귀결될 것이라는 확고한 낙관주의를 기반으로 두고 있다. 즉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나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행복 아니고 행운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그냥 오늘의 작은 행복을 더 중시한다.
대표적으로 ‘네잎 클로버’다. 스타벅스가 선보인 네잎 클로버 모양의 쿠키, 할리스의 네잎 클로버도 봄 시즌 음료로 네잎 클로버가 올라간 ‘행운이 쑥쑥 라떼’를 출시하기도 했다. 또 중국집에서 주던 ‘포춘 쿠키’가 다시 인기를 모으면서 선물로 주고받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행운에 굉장히 민감해지면서 행운 마케팅이 늘어나고 있다.
시장분석 서비스 와이즈앱·리테일·굿즈의 분석에 따르면 운세·점 관련 앱 설치자는 2020~2024년 상반기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2024년 상반기 기준, 여성 사용자 비중이 74.6%로 가장 높고, 연령별로는 20대가 가장 높고, 30대, 40대 순으로 나타났다.
김난도 교수는 “이러한 것들이 아보아의 단면이다. 어쩌면 4~5년이 지나 아보아도 소확행처럼 경쟁의 대상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이런 평범한 일상을 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도 성장기 시절에는 대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을 하고 월급이 오르고 조금만 버티면 승진이 됐다. 따라서 당시는 항상 성장하는 사고를 가졌다. 인생의 핵심은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다르다. 꿈을 물어보면 “오늘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는 것”이라고 답한다. 요즘 세대들은 현재 초고소득 시대에 살고 있다. 대신 성장률이 정체하고 있다. 여기에 사회적 갈등과 길을 걷다가 차가 뛰어들거나 증오범죄 등이 벌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는 세대들로서는 “오늘 하루만 잘 보냈으면 됐지”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특별한 순간이 아닌 평범한 일상
2024년 8월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가 국내 개봉 7주 만에 11만 관객을 돌파했다. 최근 불황에 시달리는 한국 극장가에서 몇 개 안 되는 상영관에 걸린 독립예술영화인 점을 고려하면 놀랄만한 성적이다.
영화는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의 지루하도록 반복되는 하루가 담겨 있다. 영화 속 주인공 일상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 일이다. 힘든 화장실 청소일 마저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반복되는 일상의 작지만 소중한 힘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코난테크놀로지의 소셜 분석 결과에 따르면 ‘무탈·평범·보통’이라는 단어가 온라인에서 언급된 량이 최근 2년 동안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이와 함께 언급된 연관어가 인상적이다. ‘가족·부모님·아이·남편’ 등의 가족 구성원, ‘고기·밥’ 같은 평범한 식사, ‘유튜브·넷플릭스’ 같은 일상 활동이 대표 연관어로 등장한다.
콘텐츠 영역에서도 일상이 주목받는다. 2023년 10월에 개설된 유튜브 채널 ‘인생 녹음 중’의 구독자 수는 124만 명이다. 현재 게시된 영상 41개 중 100만 뷰 이상을 기록한 콘텐츠가 6개다.
주요 콘텐츠는 7년차 부부의 대화가 담긴 블랙박스 녹음 파일을 애니메이션화한 게 전부다. 특별한 주제도 없고, 부부가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 티키타카하며, 주고받는 노래가 전부다. 올해 2월 올린 한 쇼츠 영상이 알고리즘을 타면서 인기를 얻게 됐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콘텐츠가 열광할까?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유튜브에서 이런 평이한 콘텐츠가 인기를 끈다는 건 특별한 순간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저 그런 하루’의 소중함
서울대 생활과학대학 소비자학과 김남도 교수는 ‘트렌드코리아 2025’를 통해 “그저 그런 하루를 보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이 보내는 하루는 어떤 면에서 대단하다”면서 “상상하기조차 힘든 재난과 사고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벌어질지 모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은 그냥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게 다행인 거지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어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장난감을 모으며,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 중계를 보며, 각자의 일상에 몰두하고 또 그럴 수 있는 안온한 하루에 감사한다. 매일 매일이 전쟁이다. 이런 시국에 오늘 하루 무탈하게 힘껏 살아낸 것만으로 스스로 대견하지 않은가? 꼭 행복까지 이르지는 않았더라도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출처] 트렌드코리아 2025/글로벌 패션포럼
김성준 기자 tinnews@tinnews.co.kr <저작권자 ⓒ TIN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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