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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21] 쌍방울그룹 창업주 이봉녕
“한올의 실로 세계를 당긴다”
기사입력: 2020/09/15 [14:07]  최종편집: TIN 뉴스 이 기사 후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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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뉴스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쌍방울그룹 창업주

이산(而山) 이봉녕(李奉寧)

1924~2010

 

▲ 쌍방울그룹 창업주 이봉녕

쌍방울그룹 창업주 이봉녕은 1924년 전북 완주군 초포면 송전리에서 연안(延安) 이씨인 아버지 이영옥과 어머니 최병옥의 5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시골 오지에서 자란 이봉녕은 16세가 되던 1936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외숙이 살고 있는 함경북도 성진으로 출향, 1년 동안 둘째 외숙을 따라다니며 페인트 칠 일을 한다. 이후 책방을 하는 막내외숙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2년여 간 서점 점원으로 일한다.

 

서점을 그만두며 석탄으로 휘발유를 만드는 조선석탄공업주식회사에 취업, 함경도 아오지 탄광에서 일을 한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고향에서 동생 창녕을 불러 함께 옷 장사를 시작했다. 한 달에 3회 정도 월급으로 구입한 양말과 옷가지를 껴입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에서 팔았는데 수입이 쏠쏠했다.

 

1945년 3월 징병통지를 받고 끌려갔지만 5개월 만에 조국이 해방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23세에 김복래 여사와 결혼한다. 1949년 농사를 포기하고 이리(익산)에서 무명베 장사를 하던 처남을 따라 돌아다니며 장사를 배웠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무명베 장사를 접고 시장 한편에 노점을 차리고 대신 팔아달라고 부탁받은 양말을 장날에 팔아 이익을 남겼다. 신용을 얻고 소문이 나면서 인근 지역의 물량까지 집중되며 도매상 규모를 넘어서자 이때부터 동생도 가세해 일을 돕는다. 

 

 쌍방울그룹의 효시가 된 형제상회는 형제가 함께하는 상회라는 뜻을 담고 있다. © TIN뉴스

 

노점에서 양말을 팔기 시작한지 3년만인 1954년 3월 이리 파출소 앞에 쌍방울 그룹의 기틀이 되는 형제상회를 개업한다. 이후 취급 물량이 많아지면서 잡화상으로 사업영역이 커졌고, 개업 1년 만에 10평에서 30평으로 규모를 확장했다.

 

당시 생활의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시장에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형제상회도 이러한 시장흐름에 편승했고 1958년에는 대전 이남의 충청권과 호남지역 최대의 내의류 도매상으로 자리매김한다.

 

규모가 커지면서 소규모 제조업체에서 공급받던 물량이 부족해지자 전체 물량의 절반을 대형 제조업체에서 공급받아야 했는데 대형 메리야스업체의 경우 재고 물량을 도매상에게 떠맡기거나 제때 공급하지 않아 애를 태우기 일쑤였다.

 

결국 이봉녕은 마음에 드는 제품을 직접 생산하겠다는 생각으로 1962년 9월 동이리역 부근에 대지 280평, 건평 200평 규모의 공장을 마련하고, 삼남메리야스공업사를 출범시킨다.

 

중고 편직기 7개, 재단기로 작두 4대와 핸드나이프 1대, 염색시설을 갖추고 종업원 50명과 동생 창녕이 공장장을 맡아 ‘삼남표’라는 상표로 첫 제품이 나왔는데 시장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양말과 메리야스 장사를 하면서 품질은 물론 소비자들의 성향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이봉녕에게도 초기 제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기술자들과 다투는 일이 다반사였다.

 

▲ 1973년 이리공단에 건설한 쌍녕섬유 공장 전경  © TIN뉴스

 

이봉녕은 기업의 발전을 위해 조직적이고 일관성 있는 운영체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창업한지 1년도 되기 전인 1963년 3월 1일 형제를 의미하는 쌍(雙)자와 봉녕(奉寧), 창녕(昌寧)의 이름 끝자인 녕(寧)을 조합한 ‘쌍녕섬유공업사(이하 쌍녕)’로 상호를 변경한다.

 

이때의 상호 변경은 단순히 외형적 변화가 아닌 사업가로서의 뚜렷한 미래와 목표를 세운 새로운 출발을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쌍방울도 이날을 그룹의 실질적인 출발 기점으로 잡고 있다.

 

1962년 6월 단행한 화폐개혁이 자금난과 원료난, 구매력 감소 등으로 이어지자 메리야스업계가 조업을 단축하거나 휴업을 결정했다. 쌍녕 또한 마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고 품질개선과 원가절감을 통한 경쟁력 확보에 주력했다.

 

“불량품 생산은 사기꾼과 다를 바 없다”

 

특히 면 제품에 대한 혜안과 자사 제품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던 이봉녕은 불량품이 나오면 종업원들 앞에서 가차 없이 태웠다. 조금이라도 불평의 소리가 나오면 “소비자를 속이고 불량품을 생산 공급하는 기업은 사기꾼과 다를 바 없다”며 호되게 질책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쌍녕은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장에서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으며 제품 인지도가 높아져 경영 안정을 이뤄낸다. 하지만 여전히 충청·전라도를 뺀 서울과 부산, 대구 등 전국 판매망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봉녕은 ‘삼남표’가 속옷류에 대한 명칭으로서 정감을 느끼게 하기 어렵다고 판단, 상표 변경을 모색했는데 이때 나온 게 ‘쌍방울’이다. ‘쌍방울’은 이봉녕, 이창녕 형제가 창업한 회사라는 의미의 雙(두 쌍), 鈴(방울 령)에서 따온 쌍녕의 한글식 표기다.

 

 쌍녕섬유공업사 서울판매부의 성공은 훗날 쌍방울의 전국적 유통망을 구축하는 시금석이 된다.  © TIN뉴스

 

쌍녕이 ‘쌍방울’ 상표를 앞세워 전국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1965년 당시 국내 메리야스업체는 500여개에 달했는데 주로 서울과 부산·대구, 그리고 전북지역에 밀집했다.

 

서울의 독립문표·무궁화표·태복, 부산의 왕자표·캉가루표·기차표·매표, 대구의 지구표·청포도, 광주의 남영·백마표, 전북의 백양·태창·금성섬유·해신·대성 등이 각 지역을 대표했다.

 

쌍녕은 전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카드로 서울판매부를 설치했는데 이때 서울판매부의 성공이 1960년대 중·후반 쌍방울의 전국적 유통망을 구축하는 시금석이 된다. 

 

한편, 1970년대 초반 면사의 국내 공급물량이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하면서 면사(綿絲)파동이 일어났다. 섬유업계가 원료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자 이봉녕도 전국 방적공장을 찾아다니며 원사확보에 주력했고 이때 제품 판매 호조와 함께 회사도 급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쌍녕은 1968년 국내 섬유업계 최초로 품질관리 시스템 도입 및 품질관리부를 운영하고 염색기술자를 스카웃해 염색기술을 보강했다. 또한 신제품 개발에도 주력, 제품 다양화를 통해 외의류 시장 진입을 준비한다.

 

1971년 당시 620개에 달하는 국내 메리야스 관련업체 대부분은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에 힘입어 낮은 가격의 제품을 주로 수출했다. 반면 쌍녕은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고 품질을 향상시켜 내수기반을 확고히 하는데 주력했고 그 결과 창사 10여년 만에 메리야스업계에서도 인정하는 전국기업으로 부각됐다.

 

1970년부터 제품 판매량에서 선발업체들을 제치고 앞서나가자 쌍녕은 공장 설비의 대규모 확장을 계획하고 1차로 이리공단 내 1만 평을 매입한 후 1973년 3월에 최신 대규모 설비를 갖춘 공장을 가동해 대량생산 체재를 갖춘다.

 

이때 이봉녕은 개인 기업을 넘어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1972년 6월 7일 자본금 3200만원으로 총3만2000주의 주식을 발행하며 상호를 쌍녕섬유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한다.

 

1973년 10월 중동전 발발과 함께 터진 석유파동과 선진국의 소비 둔화, 수입억제정책 등으로 국내 경제와 섬유업계가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쌍녕은 석유파동 이전에 이리공단 가동을 시작하며 수출보다 내수시장을 적극 공략,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 결과 1974년 5억 2000만원에 불과했던 내수부문 매출액은 1980년 480억 원까지 급신장하며 국내 최고 메리야스업체로 자리를 굳힌다.

 

▲ 1975년 쌍방울이 최초로 사용한 회사마크와 1977년 출범한 쌍녕방적주식회사  © TIN뉴스

 

특히 품질 좋은 면사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1977년 3월 4일 자본금 10억 원으로 쌍녕방적주식회사를 출범시키며 방적업에 진출한다. 같은 해 3월 25일에는 쌍녕섬유주식회사 상호를 ‘주식회사 쌍방울’로 변경했다.

 

소규모 메리야스업체에서 출발한 쌍방울이 창립 15년 만에 원사에서 제품까지 일관 생산하는 국내 유일의 기업으로 이름을 올리는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졌다.

 

1979년 맏아들인 이의철 사장이 취임하면서 2세 경영을 시작한 쌍방울은 동종업계 최초로 컴퓨터 시스템을 도입하고 이리에 있던 본점 소재지를 서울로 이전하는 등 많은 변화와 혁신을 추구해 나간다.

 

란제리 고급화 전략과 해외브랜드 도입을 통한 외의시장 진출 등 토탈패션업체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갖춰나간 쌍방울은 1993년 22개의 계열사를 보유한 중견그룹으로 성장했으며 자산규모는 1조 4천 2백억 원에 달했으며, 종업원은 6천 2백여명에 제계 순위 51위에 도달했다.

 

  1989년 7월 전북을 연고로 창단된 쌍방울레이더스 © TIN뉴스

 

1996년 연매출 3600억 원을 넘기며 창사 이래 최대 매출을 기록했지만 1997년 IMF외환위기 사태로 탈(脫)섬유의 기치를 내걸며 사업다각화로 추진했던 관광레저사업, 건설업 진출이 자금난에 봉착했고 결국 그룹 해체로 이어졌다.

 

1999년 8월 쌍방울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계열사들은 다른 기업에 팔려나갔고 모기업인 쌍방울은 2002년 11월 에드에셋(현 SBW홀딩스)에 매각된 후 2004년 대한전선그룹, 2010년 레드티그리스, 2014년 광림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

 

​현재 ​쌍방울은 언더웨어를 주업종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올 3월에는 태전그룹의 계열사인 오엔케이와 124억 원 상당의 방역마스크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여성 속옷 제조기업인 남영비비안을 인수하고 사명을 비비안으로 바꿨다.

 

쌍방울그룹 창업주 이봉녕은 1963년 “한올의 실로 세계를 당긴다”는 창대한 목표로 60년 역사의 토종 속옷 기업을 만들어 국내 내의산업의 패션화와 선진화에 큰 기여를 했다.

 

1997년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후 그룹이 해체되면서 경영에서 물러났으며, 지난 2010년 11월 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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