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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15 - ㈜경인양행 김동길(金東吉)

염료산업 불모지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라”

TIN뉴스 | 기사입력 2020/05/18 [11:44]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경인양행 명예회장

김동길(金東吉)

(1938~ )

 

▲ ㈜경인양행 김동길  © TIN뉴스

㈜경인양행의 창립자인 김동길 명예회장은 염료업계에서 일가를 이룬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자 경인양행을 오늘날 세계에서 손꼽히는 염료메이커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1938년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 부근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 회장은 생후 8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면서 부산으로 나온 모친의 뒷바라지 아래 일찌감치 세상살이에 눈을 떴다.


부산고를 졸업하고 1961년 서울대 사범대 화학교육과에 입학했지만 입학식에서 교복을 입지 못할 정도로 당시 형편이 어려웠다.


등록금 부담이 적은 국립대와 교사로서의 안정적인 삶을 기대할 수 있는 사범대는 당시 김 회장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전공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화학을 선택했다.


김 회장은 중학생 시절부터 집 한 귀퉁이에 자신만의 실험실을 차려놓고 몇 시간이고 틀어박혀 실험에 몰두할 정도로 화학을 좋아했다.


당시 널려있던 미군의 전투식량 박스를 책상 삼아 깨진 시험관이나 유리병을 붙여 실험한 게 전부였지만 고등학교 때 이미 대학교재를 볼 정도로 화학분야에서 남다른 실력을 자랑했다.


대학 졸업 후 중학교 과학교사로 재직하면서도 화학연구에 대한 목마름이 가시지 않았던 김 회장은 교직 생활을 병행하면서 서울대 물리대학원 화학과에 진학했다.


본격적인 화학자로서의 길을 걸으면서도 마음껏 실험과 연구를 하고 싶은 마음에 과감히 교단을 떠나 정밀화학의 근간이자 당시 첨단업종임을 자랑하던 염료회사에 취직했다.


염료업체에 근무하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 회장은 국내에서 사용하는 염료의 대부분이 외국으로부터 수입된다는 현실을 직면한다.


어떻게든 염료를 국산화해야겠다는 일념에 퇴근 이후에는 집에 마련한 실험실에서 밤을 새워가며 연구에 전념했다. 또한 염료전반에 관한 해외 전문서적과 관련 잡지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다양한 전문지식과 최신 정보를 접하기 위한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염료개발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염료업계의 실정으로는 신기술 개발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로지 연구개발이 좋아 염료업계에 뛰어들었기에 김 회장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새로운 결단이 필요한 시점에 결국 국내 염료산업의 시초를 개척한 이화산업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인다. 이후 수년을 밤낮없이 선진 염료 구조 연구와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이 시기를 통해 김 회장은 형광증백제에 대한 특허를 비롯해 다수의 염료특허를 출원하면서 염료기술자로서 두각을 나타내며 염료업계에서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는다.

 

 

▲ (사진 좌)서울 중앙연구소 개관식에 테잎 커팅하는 초기 간부진 모습(1980) (사진 우)설립 초기 국내 동종업계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시설이 좋은 연구소 내부(사진제공 경인양행)  © TIN뉴스

 

 “오늘은 연구, 내일은 개발, 모레는 품질관리”


이후 자신만의 색깔을 내보고자 1971년 10월, 33세의 나이에 경인양행의 전신인 신오화학공업사를 창립하고 본격적으로 염료사업에 진출한다.


처음 개발한 형광증백제의 국산화가 성공하면서 국내 염료시장 개척의 가능성을 확신한 김 회장은 1980년 중소기업 규모로서는 드물게 염료연구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국산 염료개발에 전념했다.


특히 기존의 형광증백제와 산성염료 등이 시장에서 나름의 인지도를 형성하자 새로운 아이템 개발에 대한 김 회장의 자신감도 커졌다.


그 결과 반응성염료의 핵심 중간체인 파라베이스(p-base)와 비닐 설폰(vinyl sulfone) 타입의 반응성 블랙염료(Reactive Black 5)를 독자개발하면서 일약 염색가공업계의 총아로 떠오른다.


1970년대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반응성염료의 개발 당시 경인양행도 경쟁사와 비슷하게 개발에 나섰지만 선택은 판이하게 달랐다. 경인양행은 ‘세계적으로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던 수프라 타입’을 독자적으로 개발, 염료사의 새장을 열었다.


또한 사업성만을 보고 염료수입에 급급했던 업체들과는 다르게 설립초기부터 형광증백제 시장을 선점한데 이어 매해 한 품목 이상의 수입대체품을 출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안목 면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경인양행의 끊임없는 품질향상과 국산화개발은 염료업계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면서 동반성장을 도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더 나아가 산업화가 한창이던 국내 섬유산업의 질을 한층 높이고 수출을 확대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한 점에서 합성염료가 화학산업을 키우고 염료의 대중화를 이끌었듯 국내 염료업계의 연구개발 의지는 이 시기의 섬유산업과 염색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하고 컬러의 대중화를 이끌어 낸 촉매제라 할 수 있었다.

 

 ㈜경인양행의 모태가 된 신오화학공업사 설립 당시 창고 및 사택의 모습(사진 좌) 인천 서구 석남동에 자리한 ㈜경인양행 공장 전경(사진 우)(사진제공 경인양행)  © TIN뉴스


경인양행은 1985년 100만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한지 1년 만에 수출 200만 달러의 탑을 쌓는가 하면 1987년 11월에는 수출 500만 달러의 탑 수상과 함께 국무총리 표창을 받으며 수출 강소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이 같은 성과가 기술 집약형 중소기업의 대표적 모델로 부각되면서 1987년 12월 김 회장은 제1회 한국과학상 산업포장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한 해 동안 두 배를 넘어서는 경이적인 수출 신장세에 만족하지 않은 경인양행은 1988년 1000만 달러 수출의 탑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뤄내며 수출기업의 표상이 되었다.


서울과 인천 지역의 ‘경인(京仁)’과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의 ‘양행(洋行)’을 사명처럼 경인양행의 세계를 향한 도전은 국내 시장에서 이전투구식의 경쟁이 아닌 세계 메이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포부에서 비롯됐다.


이처럼 거대한 수출의 탑을 쌓아올리며 오랜 기간 기술과 품질의 차별화를 기본정책으로 삼으며 글로벌 경영에 박차를 가한 결과 기업경쟁력은 물론 국가경쟁력 제고에도 일조하는 혁혁한 성과를 이뤄냈다.


또한 혁신기술에 도전으로 전자재료 분야에 반세기 염료개발의 노하우를 접목하고 첨단의 유기화학 합성기술을 발휘하여 전자케미컬업체로 가는 교두보 구축에도 성공하면서 신기술 기반의 혁신기술 기업으로서의 새로운 도약을 앞두고 있다.


기술혁신이 곧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고 나아가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다는 신념으로 항상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정신이 오늘의 경인양행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연구소에서 새로운 제품 개발에 여념이 없는 김동길 경인양행 명예회장  © TIN뉴스


무엇보다 초창기부터 스스로 연구원임을 자처하며 기술진들과 머리를 맞대면서 밤새워 연구실험에 몰두한 설립자의 솔선수범과 기술진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지금의 경인양행을 국내 염료 1위 업체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김 회장은 한국염료안료협동조합 이사장(1983∼84년)을 역임하고, 2003년 수출 5000만불탑, 2008년 수출 7000만불탑, 동탑산업훈장 등을 수훈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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