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HISTORY
태광그룹 창업자 일주(一洲) 이임용(李壬龍)
태광그룹 창업자 일주(一洲) 이임용(李壬龍)
“넘어졌다면 흙이라도 한 줌 줍고 일어나라!”
기사입력: 2019/12/09 [14:36]  최종편집: TIN 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TIN뉴스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태광그룹 창업자

일주(一洲) 이임용(李壬龍)

(1921~ 1996)

 

▲ 일주(一洲) 이임용(李壬龍)  © TIN뉴스

“기업은 북극의 빙산 같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것은 작은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밑에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큰 산이 버티고 있다.”

 

일주(一洲) 이임용(李壬龍)은 태광그룹의 창업자로, 1921년 경북 영월군 청하면에서 출생했다.

 

1935년 청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일주는 16세가 되던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선진 문물과 산업을 접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산업이 흥해야 한다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신념을 세웠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지분참여 형식으로 동양실업에 투자하며 섬유산업에 뛰어들었고 3년 후 독자적인 운영을 마음먹고 나머지 지분을 인수한다.

 

점차 사업이 커지고 수정동 공장만으로는 충분한 기계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신규 공장 설립하게 되는데 1954년 7월 문현동 공장이다.

 

그리고 태광그룹의 전신인 ‘태광산업사’가 탄생한다. 커다란 빛으로 태양 또는 우주의 중심을 뜻하는 태광(泰光)은 아내인 이선애 여사가 지었다.

 

새로 도입한 25대의 직기와 수정동공장에서 옮겨온 10대를 합쳐 35대의 직기로 공장 가동을 시작했다. 수정동 공장을 인수한 지 불과 1년 만에 설비가 3배로 늘어난 것이었다. 시장 상인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태광이 불처럼 일어난다!”

 

1958년 9월, 일주는 코트지 실을 뽑는 뮬정방기 450추를 새로 설치해 코트지도 함께 짜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복을 만드는 학생복지도 생산했다. 이미 알려진 태광의 명성에 힘입어 새로 내놓은 학생복지도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사세를 확장하면서 직원도 350명을 넘어섰고, 생산량도 하루에 양복 500벌을 지을 수 있는 50필을 생산했다.

 

일주에게 품질은 곧 자존심이었다. 태광산업사 시대를 열면서 일주는 품질관리에 더욱 신경을 썼다. 일주는 생산한 복지에 조금이라도 불량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커다란 가위로 천을 잘라버렸다. ‘Manufactured by TAEKWANG’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태광그룹 창업자 이임용 회장은 시간만 나면 공장을 돌아보며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 현장 경영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 TIN뉴스

 

그리고 태광의 첫 자체 브랜드인 ‘오리엔탈 텍스’(Oriental Tex)가 탄생했다. 밋밋하던 양장지에 특수의장연사를 이용해 무늬를 넣기 시작한 것이다. 무늬가 들어간 양장지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일주는 주식회사로 전환하며 모직물 제직뿐 아니라 방적, 아크릴 등 화섬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해간다. 이를 위해 직기 수입 차 방문한 일본의 도요보 등 내로라하는 종합섬유회사를 견학하며 꿈을 키운다. 

 

또 국내 대부분의 섬유공장이 일본제 기계를 쓰고 있을 때 일주는 생산성이 높은 이탈리아의 기계를 들여왔다. 소모품의 보충이나 물류비용을 고려할 때 모험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일주는 미래에 투자했다.

 

아크릴은 일주에게 꿈의 섬유였다. 아크릴은 양모 못지않게 질기고,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았다. 게다가 염색성도 좋고, 세탁도 쉽고, 곰팡이나 해충의 피해도 적었다. 서민이 입기에는 모직보다 훨씬 장점이 많았다. 일주는 아크릴사업 진출을 위해 때를 기다렸다.

 

1961년, 마침 박정희 정권이 집권 다음 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공표하며 수입에 의존하던 화학섬유공업 육성을 중점 목표로 내세웠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낸 일주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주는 “성공한 사람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며 석유화학분야에 도전한다.

 

 울산공단의 중화학 단지는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전초기지였다. 한국비료와 함께 울산공단을 상징하던 태광의 동양합섬 울산공장은 1967년 4월 20일 역사적인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 TIN뉴스

 

1971년 동양합섬주식회사를 흡수합병하고 태광산업 울산공장을 설립한다. 1975년 대한화섬을 인수해 본격적인 화학섬유 전문회사로 발돋움한다. 1979년 스판덱스 생산공장을 준공, 태광산업이 세계 2위 스판덱스 제조회사로 성장하는 초석을 마련한다.

 

이어 1995년 PTA 공장을 준공, 국내 최초 섬유∙석유화학 수직계열화를 완성시킨다. 이를 발판으로 국내 최초로 스판덱스와 폴리에스터 생산에 이어 2012년 국내 최초 탄소섬유 상업 생산까지 국내 섬유화학산업의 첫 타이틀이라는 기록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기틀을 마련한다. 그 결과, 제7회, 10회, 11회 수출의 날 수출유공 대통령표창이라는 쾌거도 일궈낸다.

 

▲ 1996년 11월 2일(음력 9월 22일) 향년 76세. 일주학원 교정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태광그룹 창업자 이임용 회장은 울산공장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사랑했던 모든 이와 이별했다. 사진은 영결식 모습  © TIN뉴스

 

일주는 1996년 11월 2일 76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갔으며, 금탑산업훈장이 추서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전하고 올곧은 기업, 태광을 남겨놓고 떠났지만 일주가 남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정도를 걸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 부동산을 하지 않아도, 차입경영을 하지 않아도, 권력자가 뒤를 봐주지 않아도, 원칙을 지키며 제조업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 그 자체가 되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
광고
포토뉴스
구호플러스, 봄의 ‘빛’을 내다
1/4
주간베스트 TO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