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획특집
기업가정신
“나무는 숲과 함께 자라야 한다.” 태광 신화의 시작
남들은 기적이라 말하지만 그에게는 준비된 결과였다
기사입력: 2018/10/02 [17:55]  최종편집: TIN 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TIN뉴스

[기업가정신을 묻는다] 태광그룹 창업주 일주 이임용 회장

“나는 돈으로 사업하지 않소, 나는 제조업을 하는 사람이외다.”

 

수년 간 기업가 정신을 배우자는 경영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기업가정신은 기업의 본질인 이윤 추구와 사회적 책임의 수행을 위해 기업가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세나 정신을 의미한다. 

 

기업가 정신에 대한 개념은 기업이 처해 있는 국가의 상황이나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다. 따라서 기업가정신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든 기업가가 갖추어야 할 본질적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미국 경제학자 Joseph Alois Schumpeter는 새로운 생산방법과 새로운 상품개발을 기술혁신으로 규정하고, 기술혁신을 통해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에 앞장서는 기업가를 혁신자로 규정했다. 

 

전통적인 의미의 기업가 정신 역시 슘페터의 정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과 새로운 것에 과감히 도전하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정신이 전통적 개념의 기업가정신이다. 현대에는 이러한 전통적 의미의 기업가정신에 ▲고객제일주의 ▲산업보국 ▲인재 양성 ▲공정한 경쟁 ▲근로자 후생복지 ▲사회적 책임의식까지 겸비한 기업가를 진정한 기업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요건을 모두 갖춘 경영자를 뽑는다면 국내 섬유산업의 1세대인 태광그룹의 창업주 일주 이임용 회장은 빠질 수 없다. 이임용의 경영철학은 국내 면방(태광산업)과 화섬(대한화섬) 양대 축을 모두 아우르는 몇 안 되는 종합섬유메이커사로 발돋움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이임용 회장의 경영철학은 현재 ▲신뢰경영 ▲인재경영 ▲사회적 책임 ▲정도경영 ▲위기경영 ▲내실경영 ▲품질경영 ▲현장경영으로 세분화해 실천하고 있다.

생전 이임용 회장의 임직원 훈시에서도 이 같은 경영철학이 담겨있다.

 

“내가 회사를 창업한 이유는 첫째 직원의 생활안정을 통해 사회 안정을 기하기 위함이요, 둘째 우리 국민은 반만 년의 긴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꽃인 만큼 기업을 통해 인재를 개발함으로써 사회 공헌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다.” - 1980년 2월 28일 임직원 훈시 中

 

“숲의 열매는 나누어야 한다.”

태광의 창업이념이자 이임용 회장이 평소 즐겨 하던 이 말은 태광 신화의 밑거름이었다. 이 열매를 이웃과 함께 나누자는 의미이다. 아들인 이호진 前 회장도 이임용 회장의 뜻을 이어 문화와 예술 활동 지원, 장학학술 분야 후원, 사회 소외계층 지원 (등굣길 하교지킴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실천하고 있다.

 

◆ 1950년 섬유산업에 뛰어들다

창업주 이임용 회장은 보통학교 졸업 후 1937년 일본으로 넘어가 나고야 쓰쓰이실업학교에서 고학하며 제조업에 눈을 뜨며 “산업을 통해 국가를 일으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는다. 1950년 10월 25일 그 꿈에 한 발짝 다가선다.

 

당시 개성에서 부산으로 피난 내려온 모직물 기술자인 동양실업의 김동혁 사장과 의기투합한다.

이임용 회장은 원료인 양무 구입과 생산품 판매 그리고 자금을, 김동혁 사장은 모직 짜는 일을 분담하여 동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태광그룹의 첫 걸음이었다.

 

3년 후 이임용 회장은 독자적인 운영을 마음먹고 동양실업을 인수한다. 100평짜리 부산 동구 수정동 공장에는 140명이 근무했다. 기계 수를 늘리는 데신 많은 직원들이 여유 있게 일하면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

 

점차 사업이 커지고 수정동 공장만으로는 충분한 기계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신규 공장 설립하게 되는데 1954년 7월 문현동 공장이다. 그리고 태광그룹의 전신인 ‘태광산업사’가 탄생한다. 커다란 빛으로 태양 또는 우주의 중심을 뜻하는 태광(泰光)은 아내인 이선애 여사가 지었다. 

 

태광산업사는 새로 도입한 25대 직기와 수정동 공장에서 옮겨온 10대를 합쳐 총 35대 직기로 공장 가동을 시작했고, 그것이 태광 시대의 서막이었다. 수정동 공장 인수 1년 만에 설비는 3배로 늘었다. 설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품질이었다. 이임용 회장에겐 품질은 곧 자존심이었다. 제품에 불량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가위로 천을 잘라버렸다. ‘Manufactured by TAEKWANG’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이렇게 탄생했다.

 

1958년 9월 코트지 실을 뽑는 뮬정방기 450추를 들여오면서 교복을 만드는 학생 복지를 생산한다. 만들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이를 계기로 사세를 확장하면서 직원도 350명을 넘어섰고, 하루 생산량도 양복 500벌을 지을 수 있는 50필을 생산했다. 

 

그리고 태광의 첫 자체 브랜드인 ‘오리엔탈 텍스’(Oriental Tex)가 탄생했다. 밋밋하던 양장지에 특수의 장연사를 이용해 무늬를 넣어 디자인의 변화를 준 것이 주효했다.

 

당시 태광의 복지에 대한 신뢰는 “태광 물건만 잡으면 부자가 된다”라는 소문까지 만들어냈다. 부산진시장 점포에는 전국에서 찾아온 상인들로 문전성시. 이에 아내인 이선애 여사는 상인들에게 복지를 나줄 때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자금이 적든 많든 태광 물건을 확보하려면 약속만 잘 지키면 된다.”

 

◆격동기, 화학섬유에 눈을 뜨다

1960년대 태광은 격동기를 맞이한다.

 

▲     © TIN뉴스

1961년 5.16으로 탄생한 제3공화국 박정희 정권시대는 여러모로 격동기의 시작이었다. 역사의 변화를 예감한 이임용 회장은 산업을 일으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평소 철학을 행동으로 옮긴다.

 

주식회사로 전환하며 모직물 제직뿐 아니라 방적, 아크릴 등 화섬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해간다. 이를 위해 직기 수입 차 방문한 일본의 도요보 등 내로라하는 종합섬유회사를 견학하며 꿈을 키운다. 마침 박정희 정권은 집권 다음 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공표하며 수입에 의존하던 화학섬유공업 육성을 중점 목표로 내세웠다. 이임용 회장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럼에도 당시 군사정권 시절 기업들은 부정축재자로 낙인 찍히며 반복되는 정치적 세무사찰과 은행거래 중지 등으로 고전했다. 태광도 피해가지는 못 했다. 급기야 1979년 7개월 동안 집행된 세무조사 기간 동안 은행거래가 막혔음에도 꿋꿋이 버티어냈다.

 

당시 세무조사를 담당했던 국세청장이 이임용 회장에게 이렇게 사과했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산다고 하는데 회장님은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존경 받을 만한 기업인이십니다. 그동안 참 죄송했습니다.”

1987년 단일 업종으로 첫 100억달러 수출 달성 신화를 썼던 섬유산업은 1990년대 접어들며 사양길로 접어들었다는 말이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임용 회장은 “성공한 사람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며 석유화학분야에 도전한다. 

1971년 동양합섬주식회사를 흡수합병하고 태광산업 울산공장을 설립한다. 1975년 대한화섬을 인수해 본격적인 화학섬유 전문회사로 발돋움한다. 1979년 스판덱스 생산공장을 준공, 태광산업이 세계 2위 스판덱스 제조회사로 성장하는 초석을 마련한다.

 

이어 1995년 PTA 공장을 준공, 국내 최초 섬유∙석유화학 수직계열화를 완성시킨다.

이를 발판으로 국내 최초로 스판덱스와 폴리에스터 생산에 이어 2012년 국내 최초 탄소섬유 상업 생산까지 국내 섬유화학산업의 첫 타이틀이라는 기록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그 결과, 제7회, 10회, 11회 수출의 날 수출유공 대통령표창에 이어 2016년 10억달러 수출탑 수상이라는 쾌거를 일궈 낸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태광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1985년 부산동래공장 화재로 정방기 108대, 6만여추가 전소됐다. 피해규모만 약 100억원으로 당시 가장 큰 재산피해로 기록되는 화재였다.

 

이임용 회장은 재산 피해보다 한 순간 일자리를 잃게 된 2000여명의 직원들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어느 누구라도 이번 일로 직장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며 신속한 공장 복구를 약속했다. 동시에 이자 6%의 설치자금 300억원 대출 그리고 “태광이 원하면 더 지원하겠다”며 정부의 지원도 뒤따랐다.

 

오히려 위기는 기회로 돌아왔다. 무엇보다도 이임용 회장은 화재를 위기로만 생각지 않았다. 불에 탄 2만3천평의 공장을 1개월 안에 철거하고 17년 된 낡은 기계를 교체했으며 현대식 공장으로 완벽히 재건했다. 공장 복구가 완료된 후 이임용 회장은 조흥은행 지점장을 불러 “만기가 되지 않았지만 대출금이 다 모였으니 갚겠습니다”고 말했다. 이에 지점장은 “지금 은행이자가 10%인데 만기까지 은행에만 예치해두어도 10% 이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6% 이자를 내고도 4%가 남습니다”라며 오히려 만류했다.

 

이임용 회장은 지점장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렇게 답했다. “나는 돈으로 사업하지 않소, 나는 제조업을 하는 사람이외다.” 이 일화는 이임용 회장의 삶을 다룬 추모록 표지의 머리말에서도 다루고 있다.

 

“지금처럼 외형만 치중하다가는 머지않아 땅값이 폭락하고 많은 기업들이 위기에 처할 것이며 그 중 상당수가 매물로 쏟아질 것이다”. 이임용 회장의 직감은 적중했다. 일년 후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리고 이임용 회장은 “국내 기업 가운데 적어도 태광만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전통과 저력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위기의 순간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말고 태광에서 함께 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야만 고비를 넘길 수 있다”며 직원들을 독려한다.

 

◆ 사업 다각화 및 글로벌 경영

 

 

태광은 모체인 섬유‧석유화학을 비롯해 금융, 미디어, 인프라‧레저 분야에서도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태광의 첫 사업다각화의 시작이었던 흥국생명은 1973년 인수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보험산업의 반세기를 이끌었다. 흥국금융가족은 흥국생명과 흥국화재를 중심으로 보험에서 증권, 자산운용, 저축은행에 이르는 종합금융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국내 최고의 재무건전성을 자랑하는 태광의 안정된 기반 위에 수준 높은 종합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어 미래 산업의 핵심인 방송 통신 등 미디어 분야에 진출했다. 티브로드는 국내 대표케이블방송사업자(MSO)로서 방송, 인터넷, 전화 등 복합 미디어 서비스를 가입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티캐스트는 방송채널사업자(MPP)로서 10여개의 채널을 시청자에게 공급하며 고품질의 콘텐츠 신대륙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국내 최초로 도서상품권을 발행한 북앤라이프, 세계 최고 수준의 명문 컨트리클럽을 자부하는 휘슬링락C.C.와 고객 제일주의를 지향하는 태광C.C., 디지털 TV기반의 양방향 데이터 홈쇼핑 서비스 쇼핑엔티 등 다양한 인프라를 통해 생활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태광은 삶의 질을 높이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생활밀착형 사업을 통해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 1996년 76세로 영면

이임용 회장은 1996년 11월 76세 나이로 긴 영면에 들어간다. 그 해 정부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금탑산업훈장을 추서했다.

 

일주 이임용 회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탄탄한 기업, 태광을 남겨놓고 떠났다. 일주가 남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정도를 걸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 차입경영을 하지 않아도, 권력자가 뒤를 봐주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 그 자체가 되었다. 

 

김성준 기자 tinnews@tinnews.co.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
광고
포토뉴스
블랭크블랑, 런던 감성 2번째 컬렉션
1/6
주간베스트 TOP10